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 Feb 03. 2024

40대 아줌마, 썰매를 타다.

방학 13일 차

겨울이면 아이들과 썰매를 타러 가는 곳이 있다. 청양에 있는 '알프스 마을'이다. 매년 1월 1일부터 얼음축제가 열리는데 이곳의 장점은 다양한 썰매코스가 있고, 눈과 얼음 조각 등 볼거리와 군밤, 고구마, 떡 등 먹거리와 집라인, 깡통열차까지 놀거리가 무궁무진하여 한 번쯤은 가 볼 만한 곳이다. 그렇다 보니 이 근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매년 얼음축제 시즌을 찾아보고는 방문을 해서 매 년 갈 때마다 눈 반, 사람 반인데 올해는 알프스 마을 이정표가 처음 나오는 큰 사거리부터 차를 주차하는 데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많은 알프스마을 얼음축제


"어? 이거 작년에 없었는데 생겼네?"

"이번엔 뽀로로가 아니라 캐치티니핑이다!" 

틀린 그림 찾는 것 마냥 그동안과 바뀐 조각상들을 보며 부지런히 썰매를 타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의 작전은 일명 '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오픈시간에 맞추어 들어가서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고급자 썰매는 여러 번 타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눈 놀이를 하다 점심을 매점 가서 간단히 먹고 집으로 오는 전략이다. 여러 번 왔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군밤 굽기나 깡통열차 등 체험도 안 해도 되니 아이들끼리만 놀라고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올레! 오늘은 아침이 유독 추워서 인지, 아니면 커플들이 지난 연말에 무더기로 헤어졌는지 성인이 이용하는 고급자 코스엔 대기인원이 몇 명 없다. 오는 길에 보이던 유아용, 초급자용 썰매는 벌써부터 길이 50m는 서 있는 것 같던데, 이게 웬 횡재람. 이런 날은 아들만 보내면 안 된다. 사진만 찍던 엄마도, 핸드폰만 하던 아빠도 이 기회는 꼭 사수해야 한다. 남편에게 우리도 이용권 냈는데, 이럴 때 한 번 타보자며 귀찮아하는 남편 손을 끌고 얼른 대기줄로 달려갔다. 역시나 몇 분 기다리지 않고 썰매가 내 손에 쥐어졌다. 커다란 튜브를 직접 들고 가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뭐 한 번 탈 거니까 운동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끌고 올라가기로 했다. 고급자는 경사가 가파르다 보니 올라가는 데고 숨이 턱턱 막힌다. (절대 운동부족이라서 그런 거 아님, 남들의 거친 숨소리도 분명히 들었음) 

'한 번이니까 힘들어도 올라가는 거다. 사람이 없으니까 천천히 올라가도 되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운동선수로 빙의되어 커다란 타이어를 끌고 등산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상상 속 내 모습

"엄마, 빨리 와!!"

"응. 기다려. 지금 엄청 빨리 가고 있는 거야."

아들아, 지금 엄마가 나 자신과의 싸움하는 거 안 보이니? 보채지 말고 얼른 와서 이 썰매 좀 들어주던가. 하여간 너도 연애하긴 글러먹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우리 집엔 남자가 셋이나 있는데 왜 나는 공주 대접은 커녕 매 번 짐꾼 혹은 시녀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전생에 공주 망나니여서 벌받는 건가??




드디어 우리 네 명이 쪼르륵 앉아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자 튜브 옆 손잡이 꼭 잡으셨죠? 내려가겠습니다. 출발!"

안내 소리와 함께 내가 앉아있던 바닥이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바닥이 움직인다!!" 

썰매장에도 신문물이 생겼다니!! 매 번 아르바이트생이 "끄영~차" 하며 나의 육중한 몸을 미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전기의 힘으로 바닥을 기울여 나를 태운 썰매가 자연스럽게 내려가도록 해준다. 

'역시 사람을 머리를 써야 해! 이렇게 하니 얼마나 좋아? 유후~ 더 빨라진 느낌이다~ 신난다!!"

오랜만에 타는 썰매 (매년 아이들만 태움)라 더욱 신이 나서 썰매장 끝까지 내려가려 몸을 더 숙였다. 그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몸무게가 빛을 발할 순간이다. 


무게여, 속도를 UP 시켜라!!!


그때였다. 

"저기요~ 저기요~~~!" 

옆 라인 사람들과 안전요원들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내 정면에서 여유롭게 내려오는 우리를 바라보던 직원은 나한테 달려오기까지 한다. 

'뭐지? 내가 너무 소리 질렀나?' ' 튜브가 터진 건 아니겠지?' 

뭔지 이유도 모르면서 벌써 사람들의 시선이 나한테 꽂힌 게 느껴져 민망하고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옆으로 터벅터벅 웃으며 걸어오는 남편이 보인다.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남편에게 "왜?" 하며 입모양을 크게 오므렸다 편다.

"빨리 일어나. 뒤에 난리 났다."

바닥에 털썩 튜브사이에 끼인 듯이 앉아 있는 나에게 빨리 일어나라니! 손이라도 잡아주지 남편은 대답만 해주고는 내 뒤로 휘릭 사라져 버린다. 뭐지? 뒤를 왜 보래? 왜 뒤로 가?? 하며 남편이 가는 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오, 마이갓!!! 등에 메고 있던 가방 속 물건들이 다 눈밭에서 뒹굴며 겨울놀이를 하고 있다.

'뭐야? 저거 내건데? 저기 있는 거 애들 보온병 아냐? 저게 왜 저깄지??' 

하며 그제야 가방을 돌려 내 앞으로 가져와 보는데, 역시나 가방엔 아무것도 없다. 내려오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방이 열려있던 것이다.

"어머, 어떻게 해. 죄송해요. 빨리 주울게요."

안전요원은 묵묵부답이다. 웬 아줌마가 바이킹도 아닌데 혼자 소리를 지르면서 시선강탈하며 내려오더니 썰매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이 상황이 꽤나 못마땅한 얼굴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내 심장까지 파고든다. 위에서 자신의 차례만을 기다리며 한숨 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서서히 창피함이 올라온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이니 얼굴에 철판을 깔면 된다. 또 자기 암시를 걸며 아무렇지 않은 척 나름 빨리 물건들을 주워보지만, 그동안 찌워온 지방들 때문인지 몸에 슬로모션을 걸어 놓아서 마음만큼 움직여지지 않는다. 뒷짐 지고 선글라스 낀 채 폼 재고 있는 안전요원에게서 레이저가 나오기 시작했다. 속으로 얼마나 이 진상 아줌마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도 한 겨울에 여름을 느끼는 구나. 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있다.

'에잇. 40 넘어서 이게 웬 망신살이야. 그래도 그렇지. 안전요원 너도 쫌 그렇다? 계속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거니? 같이 주워야 이 상황이 빨리 끝나서 너도 편하지 않겠어? 20대인 팔팔한 네가 허리 숙이는 건 일도 아닐 건데.. 너도 참 센스 없다. 그래서 연애는 어떻게 하고, 결혼은 할 수 있겠니? 나중에 마누라 속 꽤나 썩이겠다. 안봐도 비디오지 뭐. 속으로 청승맞은 아줌마 욕 좀 그만하고 얼른 움직여!! 너도 내 나이 되어 봐라. 이렇게 썰매 타는 게 얼마나 큰 마음먹고 하는 건지 알게되는 순간 내가 존경스러워질 테니까.'

 물건을 주우러 가족 모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 짧은 순간에 내 머릿속은 미안했다가, 서운했다가, 창피했다가, 화가 났다를 반복하며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썰매 타면 성을 간다!!



+) 알프스마을 얼음축제가 궁금하시다면...

https://blog.naver.com/sunny-star/223309726634


이전 11화 교과서는 죄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