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글쓰기와 고전소설
글쓰기는 참 어렵다. 글을 쓰다 보면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놓고 만다. 생각의 경우는 그나마 괜찮다. 미래지향적이고 내가 어떻게 나아갈까 고민하는 밝은 세계의 나니깐. 하지만 경험의 경우는 다르다. 경험했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과거의 일이다. 그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나의 몫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참 어렵다. 그리고 글쓰기는 내 과거를 스스로 들춰보게 만든다. 상처를 들춰보는 것 같아 힘들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나를 견고하게 다지게도 만든다.
오만과 편견, 데미안, 싯다르타, 이방인, 페스트, 인간 실격.
최근에 나는 고전소설에 빠졌다. 명작은 명작이듯 읽다 보면 작가가 의도한 내용이나 주제가 아니더라도 내게 어떠한 울림을 준다. 거의 매주 한 권씩 책을 읽은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은 처음에 등장인물들의 호칭이 조금 어려웠을 뿐,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책 제목처럼 내가 본 것이 정답이다라고 오만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에 대한 내용.
오만은 남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편견은 내가 남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데미안은 자아의 발견과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자아의 성장에 대한 소설이며, 이방인과 페스트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데미안과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옛날의 내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 허풍과 나쁜 짓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보았다.
나는 남중남고를 나왔다.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강한 사람이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고, 강함의 척도는 피지컬, 성적, 잘생긴 외모, 혹은 노래나 그림 같은 재능으로 나뉘었다. 다양한 무리가 형성되었고, 각 무리에는 리더가 있었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허풍이나 자랑이 그 공백을 채웠다.
나도 종종 거짓말을 하곤 했다. 싱클레어처럼 대담한 도둑 이야기를 꾸며내곤 했는데, 절도라는 행위가 흔하면서도 대담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나도 대단한 사람임을 뽐내고자 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거짓말이 들통날까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옥죄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무의미한 행동을 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내 거짓말을 간파한 친구 녀석이 부추기는 바람에, 용기를 내어 편의점에서 초콜릿 몇 개를 훔치기도 했다. 그 친구 앞에서는 의기양양해졌지만, 속으로는 나는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너는 나쁜 아이야. 나는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말 거야. 친구가 편의점으로 가서 내가 절도한 사실을 말하면 어떻게 되지? 그런 내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두려움이라는 괴물에게 나는 먹이를 계속해서 던져주고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낸 방법은 인간실격에서 나오는 스스로 광대가 되는 방법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섭다. 아마 왕따를 당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내게 남아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학부모들이 선생한테 돈을 납부하는 일종의 촌지문화가 있던 시절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그 촌지 내는 것을 거부하였고, 나는 교실에서 대대적으로 왕따를 당했다. 선생이 직접 아이들을 시켜 나를 괴롭히게 지시하였고, 나는 소심하고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 괴롭힘을 전부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나머지 초등학교 생활은 썩 좋지 않게 지나갔다. 꽤나 오랫동안 왕따를 경험한 것 같은데 그게 언제까지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나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친구 무리에 소속되고 싶어졌다. 남중남고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나는 허풍과 광대짓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심한 성격 탓에 스스로 광대가 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어디에서 웃는지, 어떤 개그가 누구에게 먹히는지를 관찰하며 데이터를 쌓아 나갔다.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용히 한방을 툭 치는 날카롭고도 선을 넘지 않는 개그로 친구들에게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카카오톡이 활성화되고 단톡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그리고 gif파일과 사진 파일을 통한 개그가 일반화되면서 나는 온라인에서 좀 더 재밌는 사람이 되었다. 적절한 시기에 보내는 사진들. 인용을 잘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고 나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요조와 나는 비슷한 점도 많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요조는 거절할 줄 몰랐다. 나는 과거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아이였지만, 이제는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요조는 자신의 광대짓이 거짓임이 드러날까 두려워했다. 나는 내 허풍이 들통날까 두려워했다.
배우가 제일 연기하기 어려운 곳은 고향의 극장이고, 더욱이 일가친척이 모두 늘어앉은 좁은 공간에서는 아무리 명배우라도 연기 같은 것은 할 수 없지 않을까요?
나는 작은 절도를 저지르고 스스로를 인간 실격이라고 깎아내리기를 몇 년 동안 반복했다. 요조는 술, 담배, 여자, 약등 굉장히 중독되는 것들에 취약했다. 나는 다행히도 커피정도에만 중독이 된 것 같다. 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중독에서 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요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남자는 돈이 떨어지면 자연히 의기소침해지고 못쓰게 되고 웃는 소리에도 힘이 없어지고 괜히 삐뚤어지거나 해서 말이야, 끝내는 자포자기 해져서 남자 쪽에서 여자를 버리게 되거든.
하지만 이러한 내 생각을 부수게 만든 것은 알베르 카뮈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조리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내가 보기에 그냥 피로에 찌든 직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아 사형에 처한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냥 한 인간이 죽었을 뿐이다. 벌레가 죽었든, 동물이 죽었든, 인간이 죽었든,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하나의 작은 생명체가 죽었을 뿐이다.
뫼르소는 감정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삶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의미하다 느끼며 또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무딘 것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100% 이해할 수 없다. 소설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순히 그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감정 없이 나열해 보자면, 그는 엄마가 죽은 날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겠냐는 장의사의 말을 거절했을 뿐이고, 그다음 날 우연히 전에 썸 타던 여자랑 만나서 영화를 보았는데 그게 개그영화였을 뿐이고, 사랑을 나누고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낸 것뿐이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말이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뫼르소는 사는 게 무의미하다 느꼈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어필하지 않아 죽은 것이다.
카뮈의 다른 소설인 페스트를 보면 페스트를 고치고자 노력한 인물은 다 죽고, 심지어 주인공의 아내마저 죽는다. 대위를 위해 힘썼지만, 주인공을 위해 남은 것은 없다. 이처럼 세상은 부조리하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갑자기 다음날 교통사고를 죽을 수도 있는 게 이 세상이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각자의 작은 이유와 소망,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수동적으로 내 삶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겁쟁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마저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평범한 일상을 살더라도 내가 통제 가능한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내가 이루고 싶은 작은 소망을 가지고, 그저 살아가면 된다. 스스로가 삶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한다면,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 수 있다.
무서워서 피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은 언제 어디서 우리를 망가트리려 할지 모른다. 잘 살아가다가도 불행은 찾아오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불행은 찾아온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세운 의미를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게 나를, 우리를 일으켜 세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