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단어가 많을수록 표현도 알아듣는 것도 많아진다.
오랜 시간 동안 더미 데이터처럼 남아 있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드디어 읽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소설 그 이상이었다. 읽는 내내 인상 깊었던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신어(Newspeak)이다.
신어는 1984의 세계관에서 단어의 수를 줄여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소설 속 슬로건인 “무지는 힘이다”와 신어와의 합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자유라 인식조차 못 하게 만든다. 이러한 설정은 섬뜩하고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신어의 예로, 우리는 좋다 good의 반대말로 나쁘다 bad를 알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신어에서는 bad라는 단어 자체가 삭제되고, 대신 ‘un’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ungood이 사용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직접적이고 강렬한 부정적 표현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상대방을 비판하고 싶어도, bad라는 단어 대신 ungood이라는 가벼운 표현밖에 쓸 수 없게 된다. 이는 사람들은 단순화시키고 사고 자체를 제한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우리는 햇빛이 쨍쨍하고 맑은 날을 날씨가 좋다고 표현을 한다.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나쁘거나 눈이 심하게 내리는 상황에서 날씨가 나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들게 된다면 맑은 날은 제외하면 전부 날씨는 좋지 않다고 표현을 해야 한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항상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있지 않지만, 그 소설 속 신어에 따르면 우리는 좋지 않다고 밖에 표현을 못하게 된다. 이렇게 언어의 단순화는 다양한 날씨의 특성을 무시하고 부정적인 인식만을 심어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를 비판하거나 전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단어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사전에서 위험한 단어들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판의 목소리를 제약하고, 체제에 대한 불만을 표현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통제 방식으로 작용한다.
소설 속의 신어는 사고를 제한한다. 마치 그들의 사고와 자율성을 빼앗아간 것처럼, 나 역시 바리스타로 일하던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단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 내 사고를 포기했다.
매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며, 자율적인 선택 없이 하루를 반복했다.
일하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만두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자율성을 포기하고 자립성을 잃으니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 안에는 성장도 변화도 없었다.
소설 속의 집단은 총 3개의 집단으로 나뉘는데, 전체의 2%를 차지하는 내부당원과 13%의 외부당원, 85%의 프롤레타리아 즉 하위계급으로 나뉜다. 그중 소설 속에서 24시간 동안 철저히 감시를 당하는 쪽은 외부당원 13%뿐이었다. 왜냐하면 85%의 하위계급에서는 이미 체제를 전복시킬 만큼의 지성인들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고, 가난하고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존재들이라서 그들의 도파민을 자극시켜 줄 흥밋거리만 있다면 그들은 오케이였기 때문이다.
바리스타로 일하던 당시에도 나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게는 9시간(1시간 휴게시간)에서 많게는 11시간 근무를 주 5일씩 하고 있던 터라 나는 나를 되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저 위에서 정해주는 스케줄표에 맞게 근무하고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때가 불행했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아무런 걱정 없이 나의 노동이 사회의 일부분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근무했을 뿐이다. 매달 꼬박 나오는 월급으로 적금을 넣고, 일부는 주식에 투자하고, 남은 금액으로 한 달을 살며 가끔은 사고 싶은 옷이나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도 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점장이 되어 하나의 매장을 관리하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가끔씩 돌아오는 진급 시험만 빼면 나름 만족하며 살았다. 카페를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보니 그 광경이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1984를 읽다 보니, 내 언어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모든 생각에는 답이 있으며, 더 나은 답과 더 깊고 풍성한 답이 존재한다. 그 차이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어말하기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처음에는 단순하게 외국인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한 생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시작했다. 문법은 물론이고 단어조차도 중고등학교 이후로 거의 손 놓고 있었던 터라, 당시 나의 영어 실력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해외여행에서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this”나 “that”만 외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꾸준한 학습 끝에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유창함을 갖추게 되었다. 나름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단어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단어를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니라,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음식의 맵기를 표현할 때 ‘low, medium, high’로 구분하거나, 맛을 설명할 때 ‘spicy, nutty, bitter, sour’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단순히 ‘i want meddle’ 정도의 단어밖에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 원트 미들이 뭐냐 어휴..)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살아갈 세상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상대방에게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 1984 속 신어는 단순한 소설 속 설정이었지만, 나에게는 강렬한 임팩트를 주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충분히 알고 있는가?” 단어가 부족하다면 나의 생각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서 신어가 단순한 언어의 통제를 넘어서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한 것처럼, 우리 역시 어휘의 폭이 좁아지면 사고의 범위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