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최측의 농간, 2016
출처)
1) 이연주 시선집, 최측의 농간, 2016
2) 최측의 농간 인터뷰(https://www.munhak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34)
3) 이연주 시인 기사(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2744627?sid=103)
내가 이 시집을 고른 계기는 별것 없다. 늘 [문학과 지성사] [창비] [문학 동네] 위주로 골라서 이번에는 아예 모르는 출판사로 고르자가 목표였다. 그러다 우연히 고른 이 시집의 겉표지는 검은색이다. 제목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시인의 전집이다. 나는 이연주 시인이 1953-1992년 살았음을 시인 이름을 검색하고 알았다. 사실 이연주 시전집 책등에 자그맣게 적혀있긴 했었다.
검색을 통해서 알아낸 사실은 이연주 시인은 간호사로 일했고 39살에 삶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주 시전집에는 > 표시를 통해서 한 연의 첫 번째 행 시작을 표시해 뒀다. 또 글자체나 여백이나 이런 느낌이 대학생 때 교내 인쇄소에서 발간한 동아리 시집을 연상시켰다.
4.19가 제목에 있기도 하고, 매음녀가 제목이기도 하며, 난관절제수술 혹은 병동이 있다. 이연주 시인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잘 녹여낸 것 같다. 그리고 표현들이 내게는 적나라하다고 느껴졌다. 평소 이미지가 잘 읽히는 시를 선호하던 것과는 많이 결이 달랐다. 그래도 계속 읽다 보니까 그 나름대로의 패턴이 있는 것 같았고, 한눈에 선뜻 의미가 바로 들어오지는 않아도 뭔가 추상적이며 아득한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정말이지 시를 고르기 어려웠다. 107p에 있는 '구덩이 속 아이들의 희미한 느낌'이 눈에 띄었다. 제목을 써놓고 보니까 이게 뭔 소리일까 너무 궁금해진다. 이것도 고른 이유가 아주 간단하다. 다른 시도 인상적인데 이게 가장 내 눈에 들어왔다. 뭔 소리인지는 몰라도 구조적으로 혹은 단어가 주는 단편적인 느낌 만으로 골랐다. 시 제목은 구덩이 속 아이들이 희미하다는 건데 죽은 아이들이 잊혔다는 말일까, 생각하며 찬찬히 시를 읽어보겠다.
1연부터 어렵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아이들이 일렬 종대 열을 맞춰 걷는다고 한다. 오른손에는 법전이며 왼손에는 야유하는 침을 바른다고 한다. 분명 이건 상징이다. 이미 '아이들'이란 말과 '검은 사제복'이란 말은 매치가 안 된다. 그런 와중에 한 손에는 법전이며 다른 손에는 야유하는 침이라니. 법전은 사실적이고 엄격하고 진실할 것 같은데, 야유하는 침은 사적이고 더럽고 무분별해 보인다.
2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키가 큰 말라깽이는/ 벌써 윙크도 할 줄 안다네'이다. 2연에서는 아이들이 얼마나 순진무구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일렬종대로 걷고 있음으로써 대비되는 것이 더 크게 비극적으로 와닿는다.
3연은 '무덤은 이미 파놓았단다 관은 없지만/ 관이란 다만 허식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덩이 속에 아이들은 죽어있다는 정황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강심제란 심장 박동을 강화하는 약물과 코카인으로 순대처럼 반죽되어 있다고 한다. 코카인도 각성효과가 있어서 강심제와 같이 쓴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죽어서 피가 흐르고 뼈와 살이 분리된 모습을 '순대' '후춧가루' '반죽'이란 단어와 함께 쓰니까 더 무섭게 느껴진다.
4연에는 '검은 기름을 먹고 신비로운 비늘빛을 내며/ 죽어 떠내려오는 물고기가 있지' 이 문장이 나는 되게 눈이 간다. 4연은 화자가 질문을 던진다. 구덩이 속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고기' '독수리'는 모두 살아있던 생명이다. 하지만 검은 기름을 먹고 죽거나, 핵연소 분진에 옆구리가 찔려 죽는다. 앞에 나온 아이들을 지금 물고기와 독수리에 비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5연 시작되기 전에 > 표시가 되어있다. 정말 매일 이게 시작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나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표시다. 5연은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고, 아이들과 어머니가 등장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얼마나 오래 늙어가야죠? 정말 지루하군요.'라고. 어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괜찮아, 괜찮아......그것이 삶 아니겠니?'라며. 여기서도 느낀 것은 아이들이 할 만한 대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아이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준다는 것은 익숙한 모양새다. 이미 아이들이 죽었다면 늙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지루하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그래서 더 비참해지는 감정이 드는 5연 같다.
마지막 연에서는 '물론 사랑이란 게 뭔지/ 그들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지.'라는 독백으로 끝난다. 처음 든 생각은 아이들이 죽어서 그들이 사랑이란 게 뭔지 알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근데 그들이니까 앞에 나온 연에 등장한 아이들과 어머니 모두를 아우르는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최근 한강 작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 작품도 광주 5.18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그 안에서 건물 안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일렬로 나오다가 군인 총에 맞아서 그대로 주르륵 쓰러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시를 과연 어떻게 해석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죽었고, 그 아이들은 아직 순수한 영혼인데, 기름이나 핵연소라는 거창한 일에 죽음을 당했고, 더는 늙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이해했을 것 같다.
나는 '구덩이 속 아이들의 희미한 느낌'을 천천히 읽으면서 이 시를 왜 내가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읽기에 다른 시보다 확실히 이미지가 잘 전달이 되었다. '구덩이' '검은 사제복' '검은 기름'은 검정으로 느껴졌고, '사랑'이란 단어는 빨강으로 인식했다. 검정과 빨강은 서로 강렬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검정은 죽음을, 빨강은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희미한 느낌'이라니, 어쩐지 너무 서글퍼진다.
내가 이연주 시인의 시선집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어렵고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근데 점점 읽으니까 그녀만의 스타일이 또렷하게 존재함을 느꼈다. 그리고 읽으면서 '시는 뭘까?' 싶다가, 결국 말이고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제목이 왜 저렇게 길며, 저건 무슨 말일까 싶던 게, 지금은 그냥 느낌 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콩깍지 씐 것 아닐까. 최측의 농간이란 출판사에서 잊힌 책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쩐지 이연주 시인을 내가 어느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
그리고 내가 이연주 시인을 아주 많이 좋아하지는 않아도, 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앞으로 좀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랄까. 묘하다. 역시 가던 길로만 가지 않고 낯선 길을 갔던 것이 잘한 일 같다. 안 그랬음 이런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