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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고쳐 쓰는 나의 회복기

구원의 본질은 불완전함에 있다

by 미리나


완벽하면 구원은 필요 없다. 흠이 없고 무너지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다면 구원이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은 결핍에서 시작했고 회복의 첫 단계는 완전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였고 그때 나와 진짜로 만나는 자리였다.


불완전함은 변화 가능성이다.
온전한 돌은 깎이지 않는다.
하지만 흠이 있는 돌은 다시 새겨질 수 있다.


구원은 다시 조각되는 과정이 아닐까.



불완전함을 부끄러운 흠으로 보지 않고 그걸 통해 내 길을 다시 배우는 치료 과정이 너무도 소중하다.





낮은 문턱의 구원, 그리고 그 문턱에 서 있는 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은, 넘어섰다는 것도, 돌아섰다는 것도 아닌 경계의 상태이다. 완전히 괜찮아진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나는 다음 위기와 구원의 타이밍을 예감하며 기다린다.


그 문턱 앞에서 나는 언제든지 병원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언제든지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원의 문턱과 반복되는 과정


2024년 10월 31일, 그날 아침 오랜만에 느껴지는 가벼운 기분에 깜짝 놀랐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나면 고통이 바로 사라졌다. 그래서 병원은 더 이상 단순히 치료의 장소가 아니라 내가 구원의 문턱을 넘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저녁에 폰벨이 울렸다.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어깨 통증은 좀 어떠세요? 증상이 좀 나아졌나요? 너무 힘들어 보였는데 치료 후 얼굴을 못 봐서 걱정돼서요”


"원장님, 좋아졌어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내가 답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하루를 또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나은 것이다.


“잘하고 있어요. 괜찮아질 거예요 내일 봬요"


늘 구원을 받지만 의사 선생님의 잘하고 있다는 말에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진 하루였다.



그러나 그런 구원은 극적이기도 했고, 조건부적이기도 했다. 내가 일상에서 버티기 위해 병원의 주사라는 비밀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문턱은 때로 너무 낮아서 자주 넘어졌다.


그런 구원의 문턱이 자주 찾아올 줄은 그때는 몰랐다. 구원의 빈도가 높아질수록 무력감도 커졌고, 자꾸만 의지해야만 하는 내 모습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구원이 너무 자주 있었다는 것, 그것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자각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내 몸인데도 나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다발성'만성통증'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이름의 복잡한 미로 속이었다.


통증과 발열은 조금씩 수그러들었지만 정신적, 정서적 고통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채 눌어붙은 먼지처럼 남아 있었다.


몸은 치유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그 뒤를 헉헉대며 따라오는 중이었다.




"낭만이 사라진 자리에서 배운 것들"

진정한 구원은 고통을 들여다보는 순간에 온다


그동안 나는 치유를 빠르게 원했고 고통이 곧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을 넘어서려 할 때 그 고통 속에 갇혔다. 고통을 ‘극복’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나 자신을 더욱 억누르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알게 되었다. 구원은 고통의 끝이 아니고 고통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아픔 속에서 나는 내 진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고통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고통을 훨씬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니 갇히지 않았고 나를 넘어서는 힘을 얻었다.




그냥 괜찮은 척 살아온 시간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 괜찮은 척을 벗어버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치유와 구원의 끝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니까.


회복은 나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니까 내면의 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괜찮은 사람의 얼굴로 살아왔다. 그 얼굴 뒤에서 나는 언제나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 얼굴을 벗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니 완전한 회복은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힘이 생겼다. 이때부터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해가 나를 잡아주는 힘이 되었다.



진짜를 말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큰 불안은 다행히 물러났지만 작은 불안들은 모래알처럼 남아 가만히 신경의 바닥을 긁었고 가끔씩 심장에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언제든 다시 아플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 안으로 접혀있었고 아픔이 돌아올 자리를 비워두며 평온을 조심스레 굴리는 중이었다.


누군가 나를 약한 존재로 볼까 봐 나는 아직도 남의 시선이라는 좁은 틀에서 100%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죽을 것 같은 날에도“내가 누군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허세 섞인 연기를 힘껏 올렸다.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도 그랬다. 더더욱 강한 척을 한 적도 있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을 믿어서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내 아픔을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들여다보는 분 앞에서 고통을 꺼내놓으면서도 약해지는 게 너무 두려웠다.


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그게 곧 나의 전부가 될까 봐 "나는 진짜로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겠지..." 하는 이상한 심리 같은 게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분이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고통들 사이에서 내 아픔이 너무 하찮아 보일까 봐 “이 정도쯤은 나 혼자 견딜 수 있다”는 가짜 결기를 꺼내 쥐게 되었다.


어쩌면 의사라는 존재는 내게 ‘구원의 문턱’ 같았기에 그 문턱을 밟자마자 조금이라도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거다. 상처투성이의 발로 문을 두드리는 대신 단단한 신발을 신고 온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그분 앞에서 만큼은 내 끝없는 고통이 감추려 해도 여과 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입을 열면 내가 겪는 이 고통이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릴 것이 무서웠다.


싹 다 말해버리면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이 정말로 끝이 없는 구조물처럼 느껴질까 봐.




연민을 피하려다 연기를 택했다


지금까지 내 시간과 마음을 갈아 넣으며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며 스스로를 부추기고 그 변화에 함께 기뻐해주던 의사 선생님이 내 말을 듣는 순간 ‘다시 원점인가요?’라며 낙담할까 봐 겁이 났다.


몸이 또다시 도로 쳐진 성과표처럼 느껴져 그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까 봐 그 염려가 내 고통보다 먼저 아팠다.


그래서 나는 가장 안전한 진료실에 주치의 선생님 앞에서 가장 위험한 연기를 했다.


괜찮은 듯 웃고, 견딜 만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쏟아 오르던 진짜 아픔은 안쪽으로 접어 넣었다.


당시 나는,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인데 무대를 내려오지 못하는 배우에 가까웠다. 진짜보다 괜찮아 보이는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덜 아프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역할이라도 잠시 더 맡아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연기야말로 나를 가장 소진시키는 일이었다. 안전한 자리에서 진짜 고통을 숨기는 일만큼 나를 지치게 하는 노력은 없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그 말들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패 같았지만 나를 더 고립시키는 작은 갑옷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괜찮은 척을 했다. 역설적으로 진짜로 무너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금 간 그릇이 빛 반사 각도만 잘 맞추면 아직 멀쩡해 보인다며 비스듬히 놓는 것처럼, 사실은 깨질까 봐 조심조심 들고 다니면서도 겉으로는 ‘나는 튼튼하다’고 말하던 그 어설프고 알량한 자존심.


누가 나를 약하다고 할까 봐 두려워 정작 나 자신에게 만큼은 잔인할 만큼 강한 척을 해야 했던 시간들은 지금 돌아보면 그게 다 외면이었다.


아닌 척, 버티는 척, 괜찮은 척으로 덮어대는 나만의 작고 서툰 방어막.


아프지 않은 날에도 아픔이 돌아올 자리를 비워두는 나, 평온 속에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는 .


몸은 괜찮아지고 있는데 마음은 다음 통증과 발열을 예감하며 몸이 오므라들어 있었다.




괜찮은 척이 끝나고 난 뒤의 세계


몸이 낫는 속도를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다. 구원의 속도보다 피로와 상처가 더 빠르게 찾아오는 듯한 삶.


진정한 구원이라기보다는 구원을 필요로 할 만큼 힘든 상태가 반복되는 삶이었고 벼랑 끝을 맴돌았다.


구원이 자주 있었으니 그만큼 고통도 자주 있었다. 구원의 빈도만큼 상처와 무력감의 빈도가 잦았다. 내 치료기는 단순한 병원과 통증의 기록이 아니다. 육체적 치유와 정서적 치유의 간극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이었고 그 사이에서 나는 가끔은 너무 지쳐서 벼랑 끝에서 구원의 손길을 갈망했다.


고통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씁쓸함보다는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나는 점점 무뎌져 갔다. 지나간 고통은 어째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반복된 일상처럼, 내게 점차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갔다.




자주 구원을 받는 삶이라면, 자주 구조가 필요한 삶이다. 구원이 자주 있다는 건 도움을 자주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위로를 자주 받았다는 말은 울 일이 많았다는 말과 다를 바 없고, 살아난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여러 번 죽어가는 기분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이 복잡한 삶 속에서 내가 깨닫게 된 건 구원은 내가 한 번 더 살아난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구원은 매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무너질 때마다 더 강해지는 것 같았고 고통과 치유의 반복 속에서 알게 되었다.


회복의 빈도는 상처의 빈도와 같다는 단순한 방정식.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결과만 기억하는 것 같다. 그들은 내가 극복했다고, 살아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는 언제나 구원이 떠오를 때마다 그 구원을 필요로 했던 약함과 피로, 상처가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원이 반복된다는 건 한 번도 완전히 치유된 적이 없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구원받는 날은 그 이전의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비로소 온전해졌다.


구원은 과거의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그냥 그 고통을 떠안고 또 한 번 살아갈 힘을 주었으니. 고통을 지나쳐 온 후에도 반복되는 회복이라니. 고통이 쉽게 잊히지 않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다니... 그러니 자꾸만 고통이 선물 같았다.



나의 구원은 성취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흔적과 묶여 있었다. 자주 살아남은 사람이지만 살아남기 전, 무너져 있던 나를 떠올릴 때마다 회복력에 대한 자부심보다 무너졌던 나에 대한 정직한 기억을 선택하게 되었다.




왜 무너진 나를 더 또렷하게 기억하게 되었을까?


회복은 순간이지만 무너짐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순간은 짧았고 고통, 불안, 침잠, 밤샘, 의심의 시간들은 훨씬 길었다. 오래 머문 냄새를 더 잘 기억하게 되어서 회복보다 무너짐이 더 진하게 남았다.


회복은 결과지만 무너짐은 나의 ‘진짜 얼굴’이기도 하다. 회복은 타이밍, 운, 환경이 섞인 결과물일 수 있지만 무너졌던 순간의 감정, 흔들림, 허약함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 것이었다.


회복은 “잘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무너짐은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겼다.


회복을 기억하면 강해진 나만 남지만 무너짐을 기억하면 인간인 나를 보게 된다. 강함은 이미지이지만 무너짐은 정말로 내 안에 있던 진짜 모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지속적으로 무너졌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무너짐의 기억을 잡고 있기도 해야 또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는다고.


회복은 끝났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무너짐은 어디가 아팠는지 알려주는 지도가 되어준다.

회복은 늘 성취였고 무너짐은 나의 진짜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잘 버텼다” “그때 나는 이렇게 기울어져 있었구나”라는 기억이 떠오른다. 비관은 전혀 아니다.


나의 치유의 진짜 시작점은 항상 그 정직함에서 시작되었으니까.




구원은 "손상된 흔적의 문서화"같았다.


치유된 자리는 어쩐지 남아 있는 얼룩처럼 끝내 지워지지 않고 머물렀다. 시간의 냄새처럼 내 피부에 스며들어 분명한 흔적이 되었다. 그때마다 그 자국들을 다시 묵상하는 듯 더듬으며 그 고통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고통이 계속해서 나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상처는 완전히 치유될 수 없는 결점을 품고도 내 삶 속에서 끊임없이 움틀 것이다.


구원은 그런, 결코 끝나지 않는 상처의 소멸보다는 반복하며 살아가는 일이었고 아픔을 내 몸의 일부로 새겨두는 일이다.


상처는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한 번도 회복되지 않은 곳에 남아 있는 불완전함이라면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나는 더없이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고백처럼 아픔을 내 삶의 일부분으로 슬쩍 자리를 내주는 것이었다.




상처는 소멸하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


구원은 내가 원하던 빛나는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증명하는 허울뿐인 증거에 불과했다. 그건 내가 어디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흉터의 기록이었다.


구원이 쌓일수록 건강해질수록 상처의 총량이 짙어지는 날도 있었다. 도움이 많았지만 그만큼 도움이 필요해진 횟수도 많았다.


삶이 내게 준 위로들은 계속 부서지는 그릇을 조심스레 붙잡아 놓는 접착제 같은 것!붙일수록, 금은 더 많아지고 모양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도 그 그릇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토록 자주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맞춰질 수 있었다는 것이 한없이 감사하게 만들었다.


부서지고도 여전히 나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처럼 느껴졌다.


구원은 내가 상상한 낭만도 아니었지만 고통의 잔여물, 상처가 고백하는 나의 역사였다. 완전한 회복이면 참으로 좋겠지만 변형된 생존 속에서 아름다움이 숨 쉰다는 것을 자주 배우게 되었다.


끊임없이 살아가는 복원력! 생명력의 고백... 나를 위로하는 작은 힘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잡고 있다는 느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는 정신과 약을 먹겠다 하시더니 오늘은 또 평온해 보이시네요? 제가 다 지나간다고 했죠? 오늘은 웃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매일 이렇게 다르다니ㅎㅎ오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에요. 이게 미리나님 본래 모습이에요. 이 시기 이런 말씀들을 더 자주 해주셨다.


감정에 머물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는 능력이 더 커졌어요.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고통이 올 때마다 연습해 보는 거죠.

함께 노력해봐요"




“어... 그런데 열이 또 오르려나? 얼굴이 좀 빨개지네. 몸은 안 빨간데 열이 지나가는 중인가?지금 많이 힘드세요?"


“아뇨, 그냥 힘들다 정도지 견딜 만해요. 지금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아요. 어서 주사 맞을게요.”


주사를 맞지 않으면 불안이 차오르던 시기라 나는 거의 예방주사처럼 여기고 있었다. 자율신경 주사는 불안을 눌러주는 안전장치였다.




과거의 불안과 현재의 평안을 비교하며 나는 겨우 회복과 성장을 체감했다. 예전에는 오늘도 겨우 잠들겠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안정된 상태로 일상을 살고 있다.


작년에도 꼬리뼈 통증이 있었고, 천골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금방 좋아졌다. 사실 주사를 얼마나 맞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이 발열상태인 나를 보시고 지난번과 분위기가 다르다고, 패턴이 엇박이라고, 열, 피부 온도, 통증, 컨디션이 뒤섞인다고 하셨다. 회복이 직선으로 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곡선으로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매일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좋아지고 있잖아. 어제보단 낫잖아." 그 말이 나를 버티게 했다.




2024년 11월 1일


만만치 않게 힘든 날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사진을 한 번 찍어 놓자며,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속상하시다며 참는 게 얼마나 힘드냐고, 늘 대견하다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너무 괴로워서 무너질 것 같다가도 공감 한마디에 나는 또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누구보다 바래주었던 마음, 누구보다 치료하고 싶었던 마음, 누구보다 함께 아파해주었던 마음이 늘 그분 눈빛과 마음에 보였다.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 늘 뻑뻑하던 저항이 덜 느껴지는 날이면 몸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다음 고통을 견딜 힘을 얻었다.


지난주도 좋았다는 말, 지난 주말은 어땠는지, 어제는 덜 힘들었는지, 오늘은 어떤지... 그 많은 환자를 보시고도 지칠 법도 하신데 늘 빠짐없이 물어봐주셨다.


혹시나 내가 잊었을까 봐 내가 얼마나 잘 견디고 있는지 잊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시는 것 같았다. 덕분에 당신도 용기를 얻는다고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그 말에 나는 또 울고야 말았다.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환자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나의 고통을 진짜로 이해하고 싶어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치유도 끝이없고 구원도 끝이 없다. 그 끝없는 구원의 여정을 통해 나는 오늘도 조금씩 더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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