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시하던 몸이, 이제 나의 동반자가 되다
2024년 10월, 나는 예전보다 강도와 빈도가 한결 완화되어 이제는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고 지나온 발자취를 차분히 돌아볼 여력도 생겼다.
자율신경실조 증상 중 하나인 불명열.
미열 수준이지만, 신경 말단이 과잉 반응하며 열을 감지했다.
몸속에서 잔불이 일렁였다. 자율신경이 불안정할 때면 불안이 단전에서 스멀스멀 올라와 몸은 스스로를 위협이라 오인했고 통증은 그 오인을 핑계 삼아 끝없이 번져갔다.
불로 데이는 듯한 고통인지, 단순한 통증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었다. 방화선을 넘어 위험을 경보하는 신경의 착각 같았다.
감각과 감정이 뒤섞이면 불안, 공포, 긴장이 따라왔다.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슴, 배, 등, 얼굴, 손발로 번지는 화끈거림이 나를 울게 했다. 검사에는 이상이 없고 몸이 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신경이 과열되었을 뿐인데 위기를 오인해 불처럼 느끼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힘든 순간마다 몸이 나를 정화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했다.
발열이 있을 때 주사를 맞기 전 뒷목과 후두하근은 늘 무겁고 눌린 듯했다. 숨을 들이쉴 때 안 아프던 목이 딱딱하게 조여 오고 머리를 뒤로 젖히면 저항이 느껴져서 작은 폭발이 언제 터질지 대기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늘 그랬다. 하지만 이제 39, 40도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주사가 들어간 직후는 완전히 달랐다. 주치의 선생님말에 의하면 빨갛게 달아오르던 등이 순식간에 원래 피부색으로 돌아갔다. 뒷목과 등에 작은 불꽃이 깜박이는 듯했다. 미세한 전류처럼 몸이 반짝!! 하고 깜짝 놀랄 만큼 생생했다.
주사 후, 의사 선생님은 늘 얼굴까지 꼼꼼히 확인하셨다. 잘 걷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걸어보라 하셨고 아무리 바쁘셔도 직접 확인하신 뒤에야 집으로 보내셨다.
주사를 무제한으로 맞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원장님께서 이 곳은 안 좋아서 좀 더 맞아야 한다며 더 놓아주실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이때다 싶어 주사를 더 맞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아마도 열이 앞으로 덜 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라도 조금 더 나아지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주사를 맞다보니 자율신경의 밸런스를 회복시키는 도움 역할이지, 평생 맞아야 하는 약처럼 의존하게 만드는 치료는 아니었다.
원장님은 늘 회복할 수 있는 상태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해주셨고 발열감이 조절되면 주사 횟수를 줄이는 쪽으로 유도해 주셨다. 나는 그때 더없이 신뢰했다.
신경들이 마치 다시 켜지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치료의 전환점이 온 것 같아 기뻤다.
아프게만 느껴졌던 주사가 이제는 회복의 통로가 되었다. 몸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치료받는 사람’에서
‘회복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었다.
신경의 회로가 다시 연결되고 살아 있음을 느꼈던 장면들을 생각하면 그립다.
통증, 혹은 열감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감각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내 몸이 반응하고 있다는 생명의 감각이 너무도 또렷했다.
가장 강렬한 체험이자 희망의 기억으로 남았다.
발열로 힘들 때마다 그때의 순수한 생명감, 벅차오르는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살아 있음을 온전히 느끼며 몸이 깨어나던 그 순간들, 생명이 다시 흐르며 나 자신과 다시 연결되던 순간이었으니까.
처음엔 긴장으로 뭉친 두려움이었던 주사가 이제는 아픈 것을 덜어주는 통로로 의미가 바뀌었다.
회복을 학습하면서 나는 나을 수밖에 없었다. 아픔보다 회복의 쾌감이 커지니까 몸과 마음은 같은 방향을 보게 되었다.
주사를 맞으면 몇 분 만에 변화가 찾아왔다. 실제로 무거움이 풀렸고 후두하근의 팽팽함이 그렇게 좋았다.
머리가 자연스러운 축으로 돌아가 소음과 저항이 사라지고 몸의 움직임이 곧 날아갈 듯 가벼웠다.
통증의 강도는 낮아졌고 긴장선이 실 한 가닥 잘린 듯 풀렸고 불편한 예민함이 가라앉으니 호흡도 한 박자 늦춰졌다.
전에는 불편이 경계였는데 이제는 불편 위에 안정이라는 보호대가 생겨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조금 편해졌다.
작은 안도감이 행동의 자유로 연결되었다.
수고하셨어요!
당분간은 열체크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에 이제는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다고, 그간 조여 있던 의무에서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괜찮다는 말보다 너무 애썼다는 위로처럼 들렸다. 몸이 덜 버텨도 된다는 신뢰와 배려의 뉘앙스였다.
예전엔 체온이 오르면 즉시 체크하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경보를 울리듯 반응했는데 이젠 그마저 귀찮지 않다.
몸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더 이상 내가 나에게 감시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 정도로 격하된 셈이다.
권위적인 지시 대신 자율성을 건네는 말속엔 내가 내 몸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믿어주시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미팅이 줄줄이 이어지는 와중에 이런 격려라니 타이밍도 참.
“우린 이 지구별 여행을 멈출 수 없죠. 저도 홧팅할게요. 미리나님도 홧팅하세요.”
"지구별 여행" 치유의 과정과 회복의 여정도 그렇게 부르니 아름다웠다.
‘함께’ 나아가자는 연대감. 누군가 내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걸어주는 기분 같은 것.
신뢰와 믿음, 자율과 격려. 삶의 여정이 이런 대화들로 채워진다면 그건 약보다 낫다.
이런 심오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소통이 평생 마음에 녹아 가끔은 약처럼, 가끔은 위로처럼 작용하겠지.
원장님 몸이 두 개면 좋겠네요.
치료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게 여전히 나에게 유효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치료자와 환자 모두가 인간이기에 서로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었고 원장님께서도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아주셨다.
나라는 사람이 짐이 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이제 치료가 안 될 것 같거나 힘에 부쳐 포기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라고 말씀드렸다.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기대는 것이 아닌 함께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인간적인 거리를 유지하려는 마음. 그리고 애착과 독립이 공존했다.
사실은 그동안 너무도 고생해 주셨기에 휴식의 공간을 선물해드리고 싶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마주 앉은자리.
당시 나는, 통증이든 삶이든, 이제는 싸우기보다 함께 머무는 법을 배우는 단계였던 것 같다. 치료와 삶, 관계에서 완벽함이 아닌 버틸 만큼의 동행을 선택했다.
나는 이제 완치를 꿈꾸기보다 버틸 만큼의 평화를 고대한다.
끝까지 싸우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멈춰 서 있어도 괜찮은 동행이기를.
그저 오늘 하루,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 큰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당분간은 열체크를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겉으로는 진료 지침 같지만 내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신뢰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환자의 반복된 자가체크와 불안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의사가 안심시켜 주는 말은 통제보다 신뢰와 위임의 언어였다.
포기는 뭣에 쓰는지 오래라는 말은 의사의 오랜 시간 쌓인 태도가 아닐까. 나의 지친 마음을 다독이면서도 아직 놓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에게는 ‘포기’는 오래전에 버려진 개념이었다.
그만큼 환자에 대한 믿음과 사명감이 분명한 사람이 나의 주치의 선생님이다.
“더 잘해보겠습니다. 완전한 회복!! 끝을 보겠습니다.”
나에게 완전한 회복은 몸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았다.
불안, 지친 마음, 치료 과정... 까지 모두 포함해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약속은 전문적인 거리감보다는 너무도 따뜻한 동행이었다.
나 역시, 당신의 의술과 힘을 믿는다고 속으로 말했다.
불과 작년인데 그 한 해를 두고 “그건 저 아니에요!”라고 말했던 내가 부끄럽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말을 했더라면 덜 유치했을까. 하지만 그 말엔 나름의 간절함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나와 동일시하지 말아 달라는 건 그때의 호소같은 생존 방식이었다.
이상하게도 감정이 격변할 땐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유치해지는 것 같다. 말이 감정보다 느리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단어를 고르기보다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 모든 유치함은 어쩌면 진심이 너무 빠르게 흘러나온 흔적이 아닐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하고 싶다는 다급한 방어.
그만큼 지난 1년은 뜨겁고 낯설고 감정이 폭주하던 시기였다. 치료의 단계가 바뀔 때마다 말했다.
그건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고.
후회도, 회피도 조금은 섞여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나는 감정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성의 언어가 늘 한 박자 늦었다.
그래서 표현이 유치해지고, 단순해지고, 때론 과장됐다. 감정의 속도가 너무 빨라 언어가 숨이 찼다.
지금도 그렇다. 가끔 사고보다 감정이 먼저 튀어나간다.
살아남기 위한 반사신경처럼.
미숙했지만 생존이었다. 조금 유치했을 뿐, 거짓은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의 아픔과 혼란, 병으로 인한 무력함은 분명 ‘내가 겪은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더 이상 나를 대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내 인생의 문단 중 하나일 뿐 문장 전체는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를 ‘환자’나 ‘그때 힘들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시선들 앞에서 말하고 싶다.
“나, 다시 시작하고 있어요. 새로 보고, 새로 믿어주세요. 그 지난 시간에 머물러 있는 나로 보지 말아 주세요."
주치의 선생님은 아셨겠지? 알아주셨을 것이다. 제발 알아주셨길 바란다.
왜 나는 주치의 선생님의 인정이 특별했을까 생각해보면
나의 고통과 회복 과정을 가장 밀접하게 지켜보며 알아주셨다. 그동안의 고통이 사실로 확인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과거의 환자로만 보지 않겠다는 사회적 표명과 같아서 보이지 않는 통증이나 심리적 고통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취급될 때가 많다. 그런데 내 경험이 정당화되는 것 같은 그 자체로 큰 해방이었다.
회복의 과정은 내 이미지와의 이별이었다. 낡은 옷을 벗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된 이름을 스스로 지우는 일에 더 가깝다.
아직 완전히 새로 태어나진 못했지만 적어도 예전의 나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다. 이제는 배역을 바꾸어 나를 다시 연습하는 중이다.
정체된 나 자신의 이미지와 결별하고 새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24년 10월 말, 열이 오른 채로 병원에 도착했다. 불그스름한 얼굴이 이제는 낯설지 않을 법도 한데 선생님들은 매번 같은 목소리로 걱정하셨다.
“오늘도 열이 나서 어떡해요. 지금 대기 환자분들이 많으셔서 조금만 누워계세요. 미리나님 순서 가까워지면 바로 불러드릴게요.”
괜찮다고, 오늘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손사래를 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 병원에서는 괜찮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얼음팩을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는 선생님, 수액실로 팔을 이끌며 억지로 눕히는 선생님, 어떤 날은 대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기다려주는 선생님, 또 어떤 날은 물 한 컵을 떠 와 내 앞에 살포시 놓고 가는 선생님... 일을 보시라 해도 “이게 제 일이에요”라며 웃으며 말했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정말 일이라면 어쩜 그렇게 따뜻하게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때의 손길과 눈빛들이 선명하다. 지금 돌아봐도 그 따뜻함이 참 고맙다.
속까지 좋지 않아 눕기가 힘들 때는 진료실 문 옆 차갑고 매끄러운 명패에 얼굴을 갖다 대며 열을 식히곤 했다.
“병원에 올 때랑 지금이랑 어떤 것 같아요?”
“몇 시부터 열감이 느껴졌어요?”
원장님의 질문은 늘 똑같지만 내 대답은 매번 다르다. 어느 날은 감정이 나를 집어삼킬 듯 쏟아져 속사포처럼 말이 튀어나간다. 또 어느 날은 열이 있어도 몸이 덜 무겁게 느껴져서 말이 천천히 나온다.
며칠 전엔 37.5도에도 숨이 막혔는데 오늘은 38도인데도 조금은 견딜 만했다. 또 어떤 날은 통증이 겹쳐서 정말 다 죽을 것만 같아 말이 안 나온다.
주사실 침대에 누워, 숨만 겨우 쉬며, 몸이 대신 대답한다. 매 순간 달라지는 나를 기록하며 작은 승리를 찾는다. 덜 힘든 날, 몸과 마음이 열을 받아들이며 적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한계를 인정하고 휴식을 선택한다.
매번 다른 날, 매번 다른 몸, 매번 다른 감정.
그런데 모든 날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열과 통증과 감정이 부딪치고 흘러 결국 나를 회복으로 끌어당겼다.
치료를 돌아보면, 의사 선생님도, 치료사 선생님도 내 속도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 몸이 균형을 찾는 속도에 맞춰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 기다림 속에는 믿음이 있었다.
“당신의 몸은 언젠가 균형을 되찾을 거예요.”
나는 한동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빠른 치료를 원했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갈망했으니까.
하지만 기다림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였다. 같이 견디는 시간의 깊이가 몸의 회복을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몸의 회복은 내 의지와 타인의 기다림이 만나 만들어지는 예술이었다. 누군가 나를 믿고 기다려준 시간 덕분에 나는 조금씩 내 몸을 믿게 되었다.
아픔보다 회복의 쾌감이 먼저 느껴지니 마음과 몸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치료는 속도보다 기다림에서 배우는 신뢰와 믿음,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의 화해다.
나는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주 행복하다.
주치의 선생님께 성장에 대한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나는 이제 진짜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 정도 상황이면 누구라도 무너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잘 버텼네요.”
조절하는 힘을 기르고 싶다는 내 오랜 노력을 누군가가 진심으로 읽어준 기분이었다.
치료의 중심이 ‘의사’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천천히 옮겨가고 있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그 오랜 대환장 파티를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무너지지 않게 곁을 내어준 마음에 그저 감사했다.
“행복한 원장님, 행복한 환자들, 우리 모두 맨발로 걷는다.”
의사와 환자의 위계가 사라지고 치유의 평등한 관계!! 모두 같은 땅을 맨발로 밟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회복은 누군가가 고쳐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속도를 맞추며 나아가는 여정인 것 같다.
나도 이제는 내 발로 걷고 있으니 나는 더 이상 병의 피해자가 아니다. 나의 회복을 선택하는 주체다.
단순히 건강이 좋아진 것도 맞지만 내 삶을 다시 책임질 수 있는 힘을 되찾았다.
그래서 오늘은 나에게 이렇게 중얼거려 본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제 나를 온전히 믿어도 되겠구나.”
그리고 약간 쑥스러워서 웃어본다.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는 걸 보면 진짜로 나아가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몸이 아프면 살고 싶고,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 너무도 절절히 공감되어 공유합니다.
지금 삶이 너무 괴로우신 분들, 읽어보시기를 꼭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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