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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후 Oct 20. 2023

자신만의 레시피

<채소의 힘>

한가한 오후 지난 어느날의 일기를 읽어보았다. 일기엔 꾹국 눌러쓴 글씨로 ‘다시 가지나 표고 버섯을 사러갈 것이다’라고 쓰여있었고 느낌표가 세개나 붙어있었다. 가지와 표고버섯이 중요한 이슈였던 적이 없는것 같은데.다시 일기를 읽어보니 앞뒤의 사정이 보였다. 당시 퇴직후 예정되어 있던 이직에 문제가 생겨 백수가 되어버렸다. 모아두웠던 돈도 급한 일에 홀랑 써버려 수중에 돈이 달랑달랑했다. 고속도로위에서 달리던 차에서 혼자 내리게 된 기분이랄까. 당시의 나는 한달이란 시간 두달이란 시간이 불안했다. 한달안에도 새로 직장을 구할수도 있다는 희망뒤엔  여섯달은 걸릴지도 모른다는 비관론이 꼬리를 물었다.



구직창을 들락거리며 마음만 바쁘다가도 막상 지원할 만한 곳은 별로 없던 때였다. 가난하고 한가하던 때의 식탁을 채우던건 쑥 한소쿠리,가지 한바구니, 표고버섯 한봉지였다. 다들 2천원, 3천원이면 족했다. 5월의 햇살과 바람은 채소를 통통하게 부풀리고 키를 쑥쑥 키웠다. 가지 한바구니를 사오면 한두개를 빼고는 키친타올에 돌돌말아 비닐에 넣고 야채칸에 넣어두었다. 가지를 뽀득뽀득씻어 길죽하고 얇게 썬다음 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굽는다. 노릇해지면 잘게 썬 파프리카와 양파가 가득든 양념장을 올려 익힌다음 바질가루를 솔솔 뿌린다. 넓은 그릇위 잡곡밥에 얹어 한끼 먹으면 향긋한 채소만찬이었다.

어느날엔 쑥 한봉지를 사와 쟁반에 펼쳐두곤 음악을 튼다.재즈를 틀어놓고 장단을 맞추며 쑥 사이사이 짙이겨진 진한 부분을 가만가만 떼어준다. 섹스폰과 퍼커션 그리고 어떤 리듬들 사이를 통과하며 쑥도 준비를 마친다. 뚝배기에 된장을 풀어 살살 끓이다 쑥을 넣어준다. 고민고민하며 이것저것 넣으며 맛을본다. 밍숭맹숭 그날의 어설픈 쑥국은 쑥향의 도움으로 식탁에 올랐다.



난 시골아이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도 바다는 먼 내륙 분지 에서 태어나 자랐다. 사방이 산이고 논이고 들이었다. 봄에는 엄마가 뒷산에서 뜯어온 쑥으로 끓인 쑥국을 먹었고 가을엔  감을 깎아 실에 줄줄이 매달아놓은 집에 살았다. 우리집 밥상엔 비린것들보단 항상 풀이 가득했었다.

푸릇푸릇한 밥상이 유달리 화사해지던 계절, 봄엔 줄기가 긴 나물들이 많았다. 엄마가 줄기를 분질러 살살 껍질을 벗기면 나오던 속이 텅빈 수수깡같은 나물을 기름과 양념으로 살살 볶으면, 어느 부분은 물컹해지지만 어느부분은 여전히 사각거려 어린나는 매의 눈으로 사각대는 부분을 찾아내 입에 넣곤 일부러 더 사각 소리를 내며 먹곤했다. 못먹은지 오래된 그 나물이 문득 궁금해져 입을 오물오물해보았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음소를 조음기관이 기억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적이 있어서였다. 분명 “ㅇ”이 들어가는 단어였는데…우엉, 아욱같은 단어들을  며칠을 흘려보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설명하니 이름을 말해주었다. 머위였다. 그래 그랬구나!  혹시 그거 어디 아무 들에서 따서 볶아준거 아니냐는 말에 그냥 동네 신작로에 많았어라는 말이 이어졌다. 맙소사. 들도 아니고 길이었다니. 어쩐지 어엿한 식재료라기보다는 들풀같고  볼품없더라니. 하지만 그런 길가의 풀들도 나를 이렇게 쑥쑥 키웠구나.



사방이 논이고 들이고 산인 그곳은 자라기엔 좁다고 생각했었다. 항상 더 크고 화려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었다. 밭에서 산에서 난것들을 먹고 자랐지만 귀한줄 몰랐었다. 하지만 내 몸속엔 그런 풀향 가득한 것들이 깊숙히 스며들어있었나보다. 하찮고 볼품없지만 은은하게 세고 강한것들이. 나를 키운 채소들이 나물들이 대견했다. 그날 머위,버섯,애호박, 가지 같은것들을 중얼거려보았다. 앞으로 나의 조음기관이 기억해둬야할 말들같았다.



시장에서 머위대를 발견한날 엄마에게 조리법을 물어보았다. 다진마늘도 이만치 간장도 간간히 넣으라는 말로 나는 레시피 배우기를 포기하고, 인터넷과 나의 기억과 감을 이용해 자르고 볶았다. 어릴때 먹던 맛은 당연히 나지않았다. 새로운 머위볶음을 먹으며 이제 똑같은 음식을 만날수 없음을 알았다. 불의 세기, 볶는 시간, 양념의 양 같이 사소한 것들이 다른 음식을 만들어낸다. 그 간발의 차이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이제껏  먹어왔던 부모님의 음식, 사랑하는 이들의 음식에서 누군가는 바다맛을 배웠고 누군가는 풀향을 알게됐다.  그런것들이  남긴 기억에 내가 지나온 시간과 경험한 음식을 더해 나만의 레시피를 만든다. 그렇게 불확실한 시간을 헤쳐나간다.

 


나는 그해 처음으로 쑥국을 끓이고 머위를 볶았다. 그렇게 부모님에게 실직을 알리지 않고 지나갔다. 약간은 외롭고 많이 불안했다. 하지만 주위의 걱정을 더하지 않고 잘 지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부엌에서 뚝닥뚝닥 썰고 칙칙칙 볶았다. 그 요리들을 배불리 먹으며 그 시기를 잘 지나간게 아니라 썰고 볶으며 잘 지나간걸지도 모른다.

언젠가의 봄에 나의 쑥국은 더 깊은 맛을 낼테고 나의 머위볶음은 좀더 감칠맛이 날테다. 지나온 시간과 이야기를 가진 내 음식들은 더 날 닮아갈것이다. 만드는 사람에 의해 조금씩 다른 음식들에선 그 사람이 보낸 시간이 있고 역사가 있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내가 끓인 쑥국같은 사람이될테고 내가 볶는 나물 같은 사람이 될것이다. 어느 힘든날의 나는 다시 가지와 표고버섯을 사러 갈 것이고, 우리의 음식은 그렇게  서로를 만나게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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