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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다쟁이 Apr 25. 2024

가속, 노화 중 입니다 (3)

(3) 반성적 평형

철이 들지 않겠다는 목표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젊음에 머물며 현실이 아닌 오직 가능성만을 타진할 수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가능성은 언제나 현실에, 현실은 언제나 구체적 실행계획이 담보된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가며 목표에 균열이 나고 있음을, 나 자신도 언젠가는 철이 들어야 함을 점차 느꼈다. 그럼에도 부정하고 싶었다. 영원한 젊음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앎에도, 그래도 목표로 한다면 천착한다면 길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에만 의존한 채 말이다.


그러다, 긴 시간 끝에 내가 '틀렸다'라는 것을 인정했다. '젊음에 천착하여 생의 발전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하자,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의 인식적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나 역시 어리다, 젊다, 도전적이다라는 것만을 긍정적으로 상정하는 '고정된 인식의 틀'로 관성적인 자세로 세상을 바라봤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노화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늙어간다. 그러나, 우리의 늙음에 대해 우리가 '의심'할 순 있다. 그렇다고 사회를, 사람들을, 지식 체계에 대해 회의를 던지기에는 너무 큰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러나, 큰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관계가 존재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제한적인 의심과 의심에 대한 투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관계, 나 자신 말이다.


요사이 자기계발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주는 쇼펜하우어나 니체는 물론 철학자 전반은 '반성적 평형'으로 스스로의 논리를 점검하며 발전시켰다.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은 어떤 상황에 있어 본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원칙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기 보다 우리의 원칙을 숙고하여 '반성'하고 현실적 상황과 '평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John Rawls


철이 들지 않겠다는 목표를 핑계로 수많은 '철 없는 행동'을 합리화 했던 지난날의 내 자신도, 스스로의 가치와 부딪히는 현실을 마주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수정하여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래도 조금 철이 드는 것이 나쁘진 않을지도?"와 같은 반성적 평형과 함께 말이다. 사실, 반성적 평형이라는 거창한 개념어를 차치하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현실과 스스로의 인식 사이에서의 간극을 발견하고 의견을 수정해 나간다. 술을 진탕 마시고 항상 첫차를 타고 들어가던 우리의 학부시절과 다른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이나, YOLO를 외치며 현실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며 소득의 70%를 저축하는 등과 같은 모습을 생각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사회인이 되어오는 긴 시간동안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통해 성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의 인식에 대항하지 않고 관성적인 방법들에 점차 편승한다.




스스로에게 철저한 의심의 눈을 던지는 것이 두렵고 어렵다는 것을, 안다. YOLO를 외치며 현재를 살던 이들이 미래를 고려하는 삶을 살기까지, 수많은 번뇌와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비혼이 결혼을, 결혼주의자가 비혼을 선택하는 것이나, 오이를 싫어하는 것이 취향과 유전적 특성이 아니라 단순한 관성 때문임을 깨닫고 변화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사람들은 세상이 AI로 인해 직무 분야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거나, 1 + 1이 알고 봤더니 2가 아닌 경우가 존재한다는 등의 뉴스에는 오히려 기민하게 반응하며 적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틀, '지위', '관습', '관계', '목표', '취향', '관성적 행동' 등과 같은 핵심적 사안들이 도전받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것들이 우리의 삶의 궤적 속에서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진 단단한 퇴적층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과 과거를 점검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고통이 아닌, 변화를 만들어내는 탈피에 가깝다. 나의 결점을, 내가 잘못한 것이나, 관성처럼 해오던 생각들을 인식할 때, 화려한 포장지 속 조그만 알맹이에 불과해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 변화하고 성장하며 내일 더 '늙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오늘, 가장 젊다. 그러나 새로움과 낭만을 쫓기엔 버겁다. 그렇다고, 단단한 퇴적층에 박혀 노화하는 내일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안정적인 일상속에서 '일탈' 할 자유가 있다. 이에 우리에게 일탈할 자유가 존재하는 한 삶의 인식을 넘어서는 지평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탈은, 우리가 우리를 의심할 때, 나에 대한 나의 믿음을 회의할 때 시작된다.




금성은 우리나라 기준 서쪽 하늘에서 관측가능하다. 순 우리말로 표현하면 샛별과 개밥바라기. 샛별은 해 뜨기 3시간 반 전쯤 떠오르는 새벽에 뜨는 별이란 의미의 샛별로, 개밥바라기는 해가 진 후 어스름에 뜨는 별이란 의미로 금성을 부르는 두가지 단어를 모두 사용했다.


금성을 찾아 보세요


나이 역시 같다. 샛별과 같은 청춘이 지나고 늙음이라는 개밥바라기가 도래했어도 우리 스스로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인 사뮤얼 울만(Samuel Ullman)이 표현처럼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늙은 것과 늙은 것 처럼 사는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늙은 것 처럼 살 것인가. 우리의 삶이 더욱 농밀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한계를 가진, 개인적 삶의 지평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부족한 존재들임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부족한 존재이기에 서로 보듬으며 더 나은 인식과 더 나은 삶의 지평으로 함께 가야 하는 존재들임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오류와 새로운 정답들에 대해 함께 대화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우리 모두의 노화가 가속노화일지 가속, 노화일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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