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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Oct 04. 2024

여기서 멀지 않아요

위로에 관한 이야기 1

 2002년 중국 천진으로 1년 어학연수를 떠났다. 드디어 중국 땅을 밟고 서 있다는 흥분과 뭐든 다 해버리겠다는 도파민이 충만하게 넘실거리는 것도 잠시.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 있었다.      


 “자전거 타는 법 배우기”     


 중국 관련 뉴스를 볼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도로를 유영하는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지, 중국이란 곳에 오면 나도 자연스럽게 자전거와 한 몸이 될 거라고 착각했었다.


 자전거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럭 겁이 나서 한동안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가만히 보니 도로 위에서 자전거를 탈 때는 사람과의 거리 혹은 버스 바퀴와의 거리가 20센티미터가 안 될 때도 많았다. 자전거 군집이 움직일 때 같이 움직여야 하고 속도를 줄일 때 나도 맞춰야 하는, 고도의 스킬이 필요했다. 직진으로 계속 밟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수십 명 때론 수백 명과 함께 같은 각도로 커브를 틀어야 할 때도 있고, 또 군집의 움직임이 우회전할 때 나만 좌회전으로 가야 할 때도 있다.


 며칠 돌아다니다 보니 거리에 중국 택시가 많기도 하고 승차비용도 저렴했다.


 ‘자전거 안 타도 살 수 있겠는데? 자전거 못 타는 사람들도 있긴 있을 테지. 다 살게 돼 있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차도 없는 주제에, 자전거 못 타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튀는 행동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굳은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타이레놀 4~6알 정도를 먹어가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아침저녁으로 학교 교정을 수십 바퀴씩 돌았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처음 도로주행을 나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도로 위의 신호등과 군집의 움직임에 맞춰 물 흐르듯 리듬에 따라 페달을 밟는 쾌감은 생각보다 컸다. 너무 집중해서 귀는 멍했지만 온몸의 감각이 모두 살아있었고, 어느새 나도 중국인들과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전거 배운 지 일주일 정도 됐다는 거, 티 안 나지? 요 자전거 위에만 앉으면 이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자전거를 잘 타게 되자, 내 자전거가 버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청나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제발 버스와는 레이싱 하지 마.’라고 한 소리 할 정도로, 난 열정적으로 자전거를 탔다. 하지만 나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은 따로 있었다.      




 나와 나의 룸메이트는 심각한 길치였다. 심지어 룸메이트가 나보다 더 심한 길치여서, 어딜 가든 나에게 의지했다. 나도 상대에게 의지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전적으로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때론 공포였다. 내가 정신줄을 놓으면 길을 잃어, 외출이 끝도 없이 길어질지 모른다는 근심으로 매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때부터 나의 중국어 실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어딜 가든 아무나 붙들고 길을 묻고, 잘 못 알아들으면 다시 묻고 또 묻고. 간절했다. 때로는 (길 몰라서 헤매를 시간 포함) 2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페달을 밟은 적도 있다. 거의 왕복 3~4시간의 강행군이었다. 그때마다 중간중간에 내려서 중국인에게 물었다.


 “离这儿远吗?(여기서 멀어요?)”


 열이면 열 ‘안 멀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들의 ‘멀다’는 개념과 한국인의 ‘멀다’는 개념에는 차이가 있었다. 평생 자전거를 탔던 중국인들에게 자전거로 30~40분의 거리는 절대 ‘멀지 않은 거리’였다. 즉 그들이 멀지 않다는 것은 앞으로 30분 정도 더 타고 가면 된다는 뜻과 비슷했다.      


 어려 보이고 많이 피곤해 보이는 외국 학생들이 자전거에서 내려 "아직 한참 멀었냐"며 묻는 질문에, 1년 동안 단 한 번도 "아직 멀었다"라고 대답한 적이 없는 중국인들. 그 대답에 신뢰가 가지 않아서 화가 난 적도 있었지만, 나에겐 분명 ‘파이팅’의 의미였다. 뭐라고 대답할지 뻔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몇 번이고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여기서 멀어요?”

 “아니, 안 멀어요. 금방이에요.”     




 가끔은 뻔한 위로나, 흔한 인사치레가 힘이 될 때가 있다.


 “너 지금 충분히 멋있어.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열심히 사니까 슬럼프도 오는 거지..”

 "너 이러다가 금방 일 내겠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 나한테만 말해 봐.”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힘든 시간도 눈 깜짝하면 지나간다.”     


 너무 힘들고 지쳐 보이니까 한마디 해주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혹은 큰 의미 없이 건네는 인사일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런 위로라도 듣고 싶다. 지금 길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잘 가고 있다는 말.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한참을 더 가야 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생각보다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위로. 그 말을 듣고 좀 더 일상의 페달을 밟아 볼 힘을 얻기도 한다.


 ‘내 생각이 틀린 걸 수도 있잖아. 나 지금, 생각보다 잘 가고 있고, 생각보다 금방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어. 내 멋대로 판단하지 말자. 적어도 오늘만큼은.’     




 “저기 저 사람한테 한 번 물어보자. 얼마나 남았나.”

 “언니.... 뻔하잖아. 또 얼마 안 남았다고 할 텐데, 뭐 하러. 그냥 계속 밟자.”

 “금방이면 간다는 말, 이 길이 맞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아? 우리 그냥 한 번 듣고 밟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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