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관한 이야기 1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통번역 프리랜서로 경험을 더 해가고 있을 때, 아는 학원 선생님의 부탁으로 중국어학원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미 통번역 일에 많이 지쳐있었다.
“선생님, 다시 대학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통번역대학원을 선택하실 건가요?”
학생의 그 질문 후 나는 더 이상 통번역일을 할 수도 없고, 강사 생활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나처럼 후회로 가득한 30대를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아이들에게 미래의 반짝이는 단면만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통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아이들에게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강의실에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거짓인 것 같고, ‘이런 행위가 사기꾼과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에 치닫게 되었다.
학생은 짧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수히 많은 고민이 되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이 뻑뻑하게 돌아가는 나사를 안간힘을 다해 돌리고 있었던 나는, 더 어떤 힘도 끌어내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함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나의 통번역 인생은 그곳에서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중국어 사랑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엄마가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온 홍콩 무협 드라마(만다린어로 더빙된)에 빠지면서 엄청난 양의 비디오를 소화해 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모두 무협 드라마에 매료되어 매일 밤 2시~3시까지 중국어를 듣다 잠들 곤 했다. 다른 친구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부르며 방 한켠을 서태지 포스터로 가득 메우던 중등시절에도 나는 홍콩영화에 빠져 하나하나 벽돌 깨듯 탐닉하며 중국어와 친해졌다.
자연스럽게 중국어 전공을 선택했던 나는 대학에서도 중국어만큼은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외고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에 입학한 친구들보다도 나는 더 깊게 중국인 교수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 중국어는 늘 나에게 신명 나는 존재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어학연수로 가게 된 중국에서 우연히 한 친구로부터 ‘외대 통번역대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바로 운명처럼 나의 꿈을 결정해 버렸다. ‘데스티니~’하는 소리도 실제로 들리는 듯했고 중국의 누런 황사도 그때는 상당히 감성적으로 느껴졌다. 자전거를 세 번째 도둑맞았을 때도 ‘그러라지 뭐, 이 꿈 없는 인간들아. 내 자전거를 빼앗아 간다고 내 꿈까지 빼앗진 못해!’라며 허공에 신나게 주먹질을 해댔다. 꿈이 내 삶을 가득 채운 느낌은 중국 연수 시절의 모든 시련을 '0'으로 상쇄시켜 주었고 꿈에 중독된 사람처럼 삶을 즐겼다.
그렇게 2년을 준비해서 대학원에 성적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했고 내 인생은 그렇게 어긋남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난 이미 어느 정도 꿈을 이룬 듯 보였고 이 길이 내 인생의 꽃길이란 확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졸업 후 만난 통번역의 세계는 나에게 절망을 주었다. 특히 통역은 일을 나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 며칠 혹은 하루만 아는 사람으로 지내는, 유통기한 며칠 안 되는 신선한 만남이 기본옵션인 직업이었다. 내향형 인간이라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전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에게 그런 직업환경은 고통이었다. 관계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닫혀버리는 통역의 세계에서 결국 어떤 문도 열지 못한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마음의 병을 얻어 힘들었다.
남의 말이나 글을 옮기는 것이 내 생각을 말하거나 쓰는 그것보다는 훨씬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엄청난 오산이었다. 남이 말하고 쓴 이야기의 틀에 갇혀있는 듯해서 터질 것 같은 생각도 마음의 병을 더해갔다. 번역하는 날은 컴퓨터 앞에 늘 초콜릿 봉지가 쌓여있었고 밤에는 맥주 캔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오랫동안 사랑했던 중국어가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했고 하루라도 중국어를 안 하고 싶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매일 인민일보 사이트에 들어가 중국에 관한 소식을 한국 소식보다 먼저 검색해서 읽던 나는, 더는 그 사이트를 열지 않았다. 같이 통번역 대학원을 나와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가는 동기, 선배, 후배들의 소식을 알고 싶지 않아서 연락을 끊고 살아갔다. 한 발 두 발, 중국어로부터 도망치기 급급했던 그 시절 나의 모습이 아직도 안쓰럽게 기억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운명이라 믿었고 사랑했고 결실을 이뤘던 중국어와의 만남은 그렇게 자기 부정과 환멸로 끝을 맺은 듯했다. 하지만 그 후에 나는 결국 통번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코스에 입학하여 1년을 애썼지만 결국 수료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대한 나의 질척임은 아마 그때 끝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꿈을 포기한 나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아무도 질타한 적 없고, 무시한 적 없는데 나는 매일매일 질타와 무시 속에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결국 나 자신의 목소리였음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결심이다. 때로 그건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끝까지 버티겠다며 괴로움을 참아가며 애쓰는 것보다 조용히 손을 놓고 내가 다치지 않는 법을 택하는 것도 하나의 결심일 수 있다. 모르는 문제만 풀겠다고 그 문제만 잡고 있으면 아는 문제도 풀 수가 없다.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견디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 말고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박애희 작가의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P266~267)
한 동안은 이렇게 도망쳐온 나를 미워했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중국어를 인생에서 지우려 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었고 혀를 차며 한심해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도망쳐온 듯한 나의 인생도 결국 모두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자국이다.
내 인생에 더 이상 껴들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결국 중국어는 지금도 나의 마음에 흐르고 있다.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고 했던 번역의 과정도 이렇게 글 쓰는 순간에 녹아들어 있다. 가끔 번역서를 읽을 때 ‘내가 번역했더라면 이렇게 안 하고 이렇게 했을 텐데’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는 내가 이제는 반갑다.
지난날, '이렇게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며 울고 있는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꿈을 향해 전진해도 되고, 꿈을 포기해도 되고, 다른 꿈을 꾸어도 되고,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꿈을 이루었다고 뭔가 된 것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 내 삶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조금씩 어긋나는 우리의 삶을 다시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돌려가는 과정이 모두 모여 ‘나’를 만든다. 그 과정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계속해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는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