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bra윤희 May 21. 2024

초 특급 핵인싸였던 친구를 보내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는 첫날. 난 늘 이런 날이 힘들었다. 분명 너무나 기대되고 설레지만 또 분명 긴장되고 피하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입지 않았던 교복은 고등 시작 첫날을 조금 더 설레게 해 주었다. ‘교복’은 소녀와 숙녀 그 사이에 있는 여고생의 아이덴티티를 증폭시켜 주는 것 같아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개학 바로 전 날에도 몇 번을 입고 벗었던지, 그날만큼은 긴장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떨리는 몸과 마음을 붙들고 교실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의 아침 조회와 1교시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려던 순간 한 친구가 옆에 바짝 다가왔다.


“안녕? 나 박수진이라고 해. 너 어느 중학교 나왔어?”


 짧은 커트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친구는 목소리가 몹시 경쾌했다. 금방이라도 활짝 웃어버릴 것 같은 그 아이의 눈웃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아까 옆에서 봤는데, 넌 눈이 되게 예쁘더라? 난 내가 눈이 작아서 눈 큰 게 부러워. 이따가 점심 같이 먹을래? 일단 너 화장실 가려했으니까 같이 갔다 오자.”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친구는 내 손을 덥석 잡고 화장실로 향한다. 이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에 빨개진 얼굴 위에 밝은 웃음이 더해졌다. 숙맥처럼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에게 불쑥 다가와 준 친구가 고맙다. 적어도 이번 1년은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많을 것만 같은 기분에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늘 함께 다녔다. 화장실을 같이 가는 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여고생들 사이에서는 흔한 우정의 표현이었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친구의 취향에 나도 기꺼이 맞춰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진이는 공부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만찢녀(만화를 찢고 나온 여자)’캐릭터였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커트 머리가 더해지면서 미소년 같은 이미지도 있었다. 학기 말에 전교생 대상으로 학예회를 개최했는데 수진이는 학교 강당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에 맞춰 정확하고 폭발적인 댄스를 선보여 ‘스타’로 부상했다. 2, 3학년 선배들까지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모여들어 “박수진이 누구냐”며 물었고, 선물을 건네는 학생들도 있었다. 수진이는 학교의 연예인이 되었다.


 수진이가 학교에서 주목을 받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나까지 주목을 받았다. ‘수진이 옆에 늘 같이 있는 애’라는 매니저급 캐릭터로 부상해 버린 나였다. 수진이에게 말 걸기 힘든 학생들은 나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선물이나 편지를 수진이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여고 내에서 수진이는 거의 서태지급 인기였던 것 같다.


 수진이로 인해 나도 이상하게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수진이의 집착이 시작됐다.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밥 먹을 때도, 매점에 갈 때도, 음악실에 갈 때도 난 수진이의 그림자가 되어야만 했다.


“윤희야, 너 혼자 다니면 안 돼.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우린 제일 친한 친구니까. 알았지?”


 언제부터인지 수진이의 사랑은 내 모든 것을 묶어 놓는 듯했다. 나는 수진이의 수족처럼 행동해야 했고 연예인이 되어버린 수진이는 그런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나는 수진이가 계획한 공부를 다 끝낼 때까지 갈 수 없었다. 매점에 가기 싫어도 수진이가 살 것이 있으면 무조건 함께해야 했다. 수업시간에도 쪽지를 보내 자꾸 나를 감시하는 수진이의 시선에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진이는 자신이 짜증 나는 일이 생기면 나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곤 했다. 사 오라는 것도 많고 내가 공부하는 시간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내 덕분에 학교에서 관심받고 있으니 정도 짜증은 받아내라.’는 듯한 이상한 심보였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관심이 부담스러워 미치겠는데 수진이는 내가 관심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기말에 진행된 학교 축제에서 수진이는 다시 ‘초대형 스타’로 부상했고,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숨 막혔다. 매일매일 울며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관계를 끊고 싶지만 전할 수 없는 이야기와 감정이 내 마음을 짓누르는 통에 공부도 안되고 매일 우울하게 그 시절을 버텼다. 결국 2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수진이의 시야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수진이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기길 간절히 빌었다. 수진이의 그림자가 되어줄 친구가 더 이상 내가 아니길 소원했다.      




 어릴 적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걸까. 그때부터 나는 몇 년간 새롭게 친구 사귀는 일을 포기했었다. 먼저 다가와 주는 친구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순수하게 받아주지 못했다. 친구라는 게 결국은 다 헤어져서 남이 되는 것이고, 나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나를 아프게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도 친구들을 깊이 사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답답하기까지 하지만 고등시절 수진이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관계에 대해 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나를 사랑해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된다. 수진이도 나도, 그때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겠지. 나를 사랑하게 되면 친구가 내 곁을 떠나도 힘들지 않다. 나를 이해하듯 친구도 이해해 줄 수 있으니까.

 서로의 공간을 인정하고 다가서는 관계가 좋다. 그렇게 인정해 주면 친구의 연락이 뜸해도 서운하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뜸하다가 영영 멀어진다고 해도 많이 슬프지 않다. 우리의 인연이 끝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테니까.     

 최근에 나름의 성과로 기쁜 일이 있어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나랑 술 한잔 할 수 있겠냐는 톡에 친구는 바로 알았다고 답했다. 잠시 후 걸려 온 전화.


“너 근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내가 지금까지 너랑 사귀면서 니가 먼저 술 먹자고 한 적이 없거든. 진짜 심각한 문제는 아니지?”


 안 좋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일이라며 말하고 끊었다. 그렇게 여러 번 술잔을 기울였는데, 내가 한 번도 먼저 술 먹자고 한 적이 없다는 친구의 말이 충격이었다. '늘 매번 이 친구가 다가와 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고마웠다. 눈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제야 수진이의 흔적이 다 사라진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이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늙어가고 있겠지’하고 이제는 떠나보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