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bra윤희 May 28. 2024

하나뿐인 여동생이 떠난답니다

   내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떠나던 대학 3학년 때 동생은 대학 1학년이었다. 당시 나도, 동생도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도 1년 후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예정이었다. 나는  몹시 조심스럽게 중국으로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유도 묻지 못한 채 방에서 나오면서 눈물이 났다. 서운함과 민망함에 속으로 진심을 담아 저주했다. ‘그래 너 혼자 중국 가서 어디 잘 사나 보자! 언니 없이 좀 울어 봐야 쟤가 정신을 차리지’


 하지만 울게 된 건 나였다. 중국에 가서 힘들 때마다 떠올랐던 건 엄마아빠가 아닌 동생이었다. ‘동생이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고 막막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거의 마음은 내가 동생인데?’하곤 스스로를 한심해했다. 




 동생은 나와는 다르게 생활력이 엄청난 사람이다. 우리 가족 사이에서는 ‘쟤는 사막에서도 모피코트 팔며 잘 살 아이’라는 표현으로 동생을 정리했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높은 판단력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정리한 대로 착착 진행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심지어 사교성도 좋고 길눈도 밝으며 유머러스해서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력이 오히려 급격히 상승한다. (어떻게 된 게 나는 이런 DNA를 하나도 받지 못했다) 난 늘 이런 동생이 부러우면서도 경이로웠다.      


 그래서 그랬는지, 내 성격이 문제인 건지, 어릴 때 엄마 심부름으로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갈 때도 난 항상 동생을 데리고 갔다.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긴 하지만 3살 어린 동생에게 한 껏 의지했었다. 얼마나 못난 언니였으면 돈도 동생에게 쥐어주면서 ‘니가 계산해’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생은 유통기한까지 꼼꼼하게 챙겨 심부름을 완수했던 아이였다. 동생이 임무를 완수하면 나는 물건만 달랑 들고 마치 내가 다 해결한 양 엄마에게 드렸었다. 이 정도 되면 참 한심해서 써먹을 대가 없는 언니 같지만, 동생과 나는 늘 죽이 잘 맞아서 종종 싸우면서도 늘 깔깔거리는 친구로 자라왔다.      


 20대 때 우린 같이 점을 본 적이 있다. 동생 점과 내 점을 봐주시던 아저씨가 마지막에 하신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결혼을 한다면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해요. 언니는 동생 같은 사람을, 동생을 언니 같은 사람을. 만약에 나중에 사업을 한다면 두 분이 꼭 같이 하세요. 완전 찰떡궁합인데?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 맞죠?”

 동생이 내 눈빛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우린 그렇게 궁합이 잘 맞는 자매로 수십 년을 함께했다.      




 우리 모두 결혼을 하고 동생 곁에는 나보다 조금 더 생활력이 떨어지는 분이 함께하게 되었다. 동생의 생활력과 상황돌파력이 우리 제부에게도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갔으리란 확신이 든다. 제부는 평생 공부만을 생각한 외골수 학자이기 때문에 동생의 등장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제부는 동생과 결혼을 하면서 모든 일에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사회에서도 날개를 단 듯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동생은 지금도 제부의 신실한 비서이자 조교로 자리하고 있고 아마 평생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만 같다. 제부의 모든 인증서를 동생이 관리하며 아이디 비밀번호까지 동생이 체크한다. 이쯤 되면 제부는 나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란 판단이 든다. 아이디 비밀번호는 본인이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제부는 늘 동생의 그런 면을 존경하고 또 존경하며 살고 있다. 존경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동생 없이 보일러도 못 켜는 제부가 1년간 미국의 추운 동네로 안식년을 떠난다. 제부 때문에 동생과 조카 모두 7월이 되면 1년간 내 곁을 떠난다. 제부는 왜 교수 같은 걸 해서 동생이랑 나를 생이별시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녕 혼자 떠날 수는 없는 일인가 여쭤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다. 하지만 결국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동생이 떠나는 길에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는 일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와 동생은 지금 같은 아파트 바로 옆동에 나란히 살고 있다. 거의 매일 만나고 이야기하고 속닥거리는 게 지금의 일상이다. 붙어살면서도 우린 서로의 공간과 상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멋진 자매라는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는 종종 눈빛만 봐도 ‘척척’ 알아듣는다.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서로의 장점을 발휘에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 버린다. 이심전심, '착'하면 '척',  서로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1초도 필요 없는 순간이 많다.  그 점집 아저씨가 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런 동생이 1년간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이미 “미안하지만, 언니는 공항에 도저히 갈 용기가 없다”라고 선언했다. 만약 공항에 간다면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도 잠깐의 상상으로 눈물이 흐르는데, 아무리 아쉬워도 공항은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 


 ‘증명사진을 찍었다’, ‘미국비자를 받으러 간다’ 슬슬 이런 이슈가 나를 조여 온다. 내 눈물샘을 자꾸 자극한다. 못난 언니 티 내기 싫어서 혼자 집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그런 나를 동생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린 또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걱정하겠지. 1년은 분명 금방 지나갈 거다. '빨리 여름이 끝났으면, 빨리 봄이 왔으면' 하는 그런 바람들이 시간을 재촉하고 만남을 당겨주겠지. ‘그래,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는다.      


“돌아오는 날엔 언니가 꼭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
그땐 울더라도 슬픈 눈물이 아닐 거니까 맘 편히 갈게.
동생아 잘 다녀와~~.
평생 이 말은 한 번도 안 한 것 같은데,
언니가 많이 사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