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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Apr 25. 2024

이혼한 지 14년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걸 미국에서는 요즘 들어 유행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국 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더 짙은 미국에서 이제야 유행이라니...


 할리우드에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배우인 캐머런 디아즈가 '수면이혼'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녀는 한 방송에서 “부부가 침실을 따로 쓰는 것을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미국의 방송인들이 하나 둘 ‘각방생활’을 고백하면서 미국에서 ‘수면이혼’이 슬슬 유행하는 조짐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이 나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부가 한 이불을 덮고 평화롭게 잠드는 커플은 다섯에 한 커플 정도 될까 말까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수면이혼’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나와 남편도 오래전에 ‘이혼’이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면 ‘각방 쓴다’는 표현보다는 ‘수면이혼’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각방을 쓴다고 하면 ‘사이가 안 좋다’라는 의미가 깔려있는 것 같아서 괜스레 부정해보고 싶다. 굳이 ‘주관적’으로 말하면 함께 자지 않는다고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우려하시는 ‘그런 일’들도 부담 없이 슬기롭게 대처한다. 오히려 수면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줄어 상대에게 불필요한 짜증을 안 내게 되는 순기능을 더 강조하고 싶다.     




 친정 부모님을 보면 한 번도 ‘수면이혼’을 하신 적이 없다. 엄마의 굳건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아빠도 그걸 원하셨는지는 아무도 물은 적이 없다.


“부부가 한 이불에서 자야지!! 그래야 싸워도 다시 금방 화해할 수 있는 거야.”


 아빠는 코골이가 심하고 엄마는 뒤척임이 남다르고 주무시다가 ‘느닷없이 전등 켜기 대장’인데 두 분이 이렇게 오랫동안 한 이불을 덮으시다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엄청난 희생과 인내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희생과 인내의 또 다른 말은 ‘사랑’ 일 테니 두 분은 분명 유행을 거스르는 사랑꾼이다.   




 엄마가 안타까워하고 계시긴 하지만 나와 남편은 이혼을 한 지 14년은 넘은 것 같다. 남편은 엄청난 코골이의 소유자다. 신혼 초에도 늘 ‘저 남자보다 내가 먼저 잠들게 해 주세요’하는 기도를 수십 번 하며 잠을 청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정당하게 ‘수면이혼’이 시작됐다. 처음엔 ‘큰애만 좀 크면’했던 것이 ‘둘째만 좀 크면’으로 갔고 이제는 ‘그냥 이렇게 살자’로 넘어왔다.


 물론 합방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4년 해외 파견이 끝나고 나는 큰 결심을 하고 그의 옆에 누웠다. 귀마개도 준비하고, 남편 입을 벌리지 못하게 하는 테이프도 구매하여 열심히 붙였다. 그렇게 그의 옆자리를 사수하려 노력했다.(엄마의 ‘한 이불 교육’의 부작용인 것 같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귀마개는 사라져 버렸고 테이프도 남편에게 완패하여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코골이 수술을 고민한 적도 있지만 의사가 적극 권하지 않았다.

일본제품도 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소중한 중년의 밤잠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중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수면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아서 수면시간도 줄어가는 거라고 했는데, 그런 감성적인 이유가 아닌 과학적인 이유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호르몬에 매일 무릎을 꿇는 삶을 살아가는 중년에게 깊은 수면이 얼마나 중요한가!!!

결국 나는 둘째 아이 방에 요를 깔고 자기 시작했다. 난민 같은 신세가 조금은 처량하긴 하지만 코골이 없는 세상에서 조용하게 듣고 싶은 음악을 듣다 잠드는 바닥생활을 너무나 사랑한다.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남편은 바닥에 누워있는 내가 ‘자나 안 자나’ 살짝 방문을 열어 확인하곤 하는데 그럴 때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입도 살짝 벌린 상태를 유지한다. 누워서 나만의 수면의식을 하고 있는데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커진다.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짜증이 나고 뇌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다. 한마디로 한층 더 늙어버린 느낌이다. 실제로 수면 부족은 뇌졸중, 심혈관질환, 치매의 위험도를 높인다 하니 우리 수면이혼의 정당성은 무게를 더해갈 뿐이다.


 살짝 걱정이 되는 건 남편의 무호흡증상이다. 30대 때만 해도 무호흡을 하든 말든 내 귀에 대고 코를 코는 상황이 너무 싫었는데, 이젠 슬슬 걱정이 된다. 나 없이 혼자 방에서 코를 골다가 영영 숨 쉬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오싹한 기분이 든다. 새벽에 가서 가끔 확인해봐야 하나 하는 생각, 나도 부정맥이 있는데 내 심장에 이상이 오면 누가 119에 전화를 해줄까 그런 걱정도 가끔 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최근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겨우 상황이 마무리되고 이제 내 수면의 안정을 찾은 것 같은데, 둘째 아들의 코골이가 점점 심해진다. 요즘은 내가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데시벨로 코를 골고 있는 둘째 아들을 흔들어 옆으로 눕혀놓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 방도 떠나야 할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그 언젠가가 바짝 당겨지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하는 요즘이다. ‘이 모든 고민을 왜 나 혼자만 하고 있는 기분인가’하는 푸념도 더해진다.

 이거 저거 다 됐고, 내 방 있는 큰 집으로 이사 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다. 남편은 자유롭게 코 골고, 둘째도 수면 독립하고, 나도 행복하게 잠들고. 모두에게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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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사진출처: Can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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