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장거리 연애를 아는가? 서울과 인천, 혹은 서울에서 대전정도면 장거리 연애가 가능할 것이다. 좀 더 무리를 해보자면 서울과 부산도 연애가 가능하긴 하다. KTX를 타면 3시간이면 가니까. 하지만 한국과 미국이라면 연애가 가능할까? 아마 처음에는 가능하다는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손을 들고 말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이였다고 해도 대륙을 넘나드는 장거리 연애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기에.
내게도 장거리 연애의 기회가 있었다. 처음부터 장거리를 염두에 두고 만난 것은 아니다. 고향이 대구인 아가씨를 소개받았는데 소개받을 때는 분당에 살고 있던 상태였다. 서울에서 분당까지의 거리가 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첫 만남부터 밤늦게까지 만나는 등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밤을 같이 새기도 했다. 모텔에 갔냐고? 그건 아니다. 남대문 새벽 시장에 가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해장국까지 마시고 헤어졌다. 나도 웬만큼 술을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도 말술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새벽까지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정도면 사귀는 것이 아니냐고? 사귈 뻔했었다. 여기서 사귈 뻔했었다는 것은 거의 사귀기 전까지 갔었는데 어이없는 통보를 받는 바람에 고백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미국행을 통보받은 것이다. 잠깐 어학연수 다녀오는 거라면 기다려줄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거의 이민을 염두에 둔 미국행이라고 했다. 그럼 대체 왜 소개팅을 나온 걸까?
그녀도 내가 그리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떠나기 일주일 전에 내게 함께 미국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내가 미국에 가서 뭘 하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그녀가 미국에 기반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도 미국은 거의 도피성으로 가는 것이었다. 재혼한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국에 가서 살기 위해 떠난다고 했다. 정해진 일자리는 당연히 없었고 미국에 가서 잡일이라도 하면서 버텨볼 생각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보고 함께 가자고? 내가 아무리 사랑에 목말라 있는 놈이긴 했지만 그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도 나가지 않았다. 괜한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 배신감만저 들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한 달 동안 잘 만났다고 하더라도 미국으로 떠날 사람이 뭐 하러 소개팅을 나와서 내 마음을 헤집어 놨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녀는 내 기억에서 잊혀 갔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소개팅을 해줬던 지인을 통해 그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대구로 약속을 잡고 달려갔다. 대구까지 갔으면 뭔가 확실한 액션이 있어야 했는데 그냥 만나고 다시 돌아왔다. 이후 서울에서도 한 번 더 보긴 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소개팅을 했을 때의 알콩달콩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도 나이를 먹었고 그녀도 나이를 먹은 탓일 거다. 세월은 우리를 바꾸어 놓았고 그때의 좋은 감정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만약에 그녀가 미국을 떠나지 않고 나를 믿고 남았다면 나도 그녀에게 올인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떠나가 버렸고 우리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사랑에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