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지금까지 소개팅의 많은 실패 사례들을 언급했었다. 때로는 내 실수로 인한 것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가 손 한번 못써보고 끝을 고한 경우가 많았었다. 제대로 만나보지도 않고 바이바이 하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오늘 할 이야기는 전자 쪽이다. 바로 내 실수에 의해 안된 케이스다.
때는 바야흐로 30대 중반이었다. 체력도 좋았고 의욕이 충만했던 시절이기에 안정된 직장보다 도전할 만한 직장을 찾아다니던 시절이었다. 마침 전 직장에서 일하던 동생이 자신이 하는 사업을 함께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세상 물정에 대해 어두웠던 나는 사람만 믿고 덜커덕 그 동생의 회사에 출근하게 된다. 말이 출근이었지 딱히 근무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월급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내가 개발하던 것은 쇼핑몰 솔루션이었다. 솔루션을 개발해서 소프트웨어를 시장에 팔자는 계획이었다. 개발 기간에는 약속된 월급은 없었다. 전 직장에서 받는 퇴직금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버티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그랬었다. 사람을 너무 믿었었다. 함께 노력하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독이 된 케이스였다. 몇 개월간 열심히 개발을 했다. 동생들은 시장 조사를 하고 나는 사무실에 남아서 개발을 했다. 그러던 중에 디자인이 필요해서 디자이너를 뽑게 되었다. 당연히 그 직원에게는 월급이 지불되었다. 20대 후반의 키가 큰 아리따운 아가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생들이 주로 외근을 나가는 바람에 사무실에는 오롯이 그녀와 나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디자인을 하고 나는 개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이렇게 몇 개월을 함께 보냈다. 이때는 몰랐었다. 그녀가 내게 호감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예전 에피에서도 나오지만 당시에 나는 감각이 무딘 곰이었다. 엄한 소개팅에서만 잔뜩 깨져서 돌아오고 정작 가까이에 있는 보석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실은 나도 그녀에게 아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키도 크고 늘씬한 그녀가 설마 내게 호감이 있겠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계속된 소개팅의 실패가 내 자존감을 약화시킨 모양이다. 돌이켜 보면 점심이고 저녁이고 나와 줄곧 붙어서 먹으며 매일 몇 시간씩을 같이 일했는데 싫었으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로 식사를 하겠다는 핑계를 댔었겠지. 그녀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답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아쉽게도 프로젝트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몇 개월에 걸쳐 공들여 만든 솔루션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계약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소규모 계약만이 이뤄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회사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무보수로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그녀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관두게 된다. 마지막날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식 자리에서도 헤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의례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귀담아듣지는 않았었다. 그녀가 관둔 지 한 달쯤 지났을까? 같이 일하던 동생이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형, A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무슨 말이야?"
"그 친구가 형 안부 물어보던데요? 혹시 만날 생각 없어요?"
"에이, 내 처지에 무슨... 다음에 함께 볼 기회 있으면 보지 뭐"
그때는 몰랐었다. 이 대화가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녀는 나와의 만남을 원했었다. 하지만 미련 곰탱이였던 나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동생이 내 의견을 물어본 것은 그녀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전해 듣고 그녀도 그제야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나도 실은 그녀를 좋아했었는데... 이미 버스는 떠나간 뒤였다. 몇 년 뒤에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생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더라. 그녀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말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인연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그때는 왜 이리 눈치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때의 실수는 고스란히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소개팅 굴욕의 역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쯤 되면 자업자득이라고 말할만하다. 들어오는 인연은 멍청하게 놓쳐버리고 억지로 인연을 맺으려 하니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