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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덕후에게 뺏긴 그녀

소개팅 필패의 역사

by 검마사 Feb 12. 2025

소개팅을 나온 그녀는 왠지 모르게 위축이 되어 있었다. 위축되어 있는 사람 기를 살리는 것은 내 전문이지 않은가? 계속해서 말을 걸고 실없는 농담도 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맛집도 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그녀도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소개팅에 나오기 한 달 전에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한다. 헤어진 이유가 가관이었다. 남자친구는 완전 게임광이었다. 그들의 데이트 장소는 PC방이었다. 밥도 PC방에서 먹고 이야기도 채팅으로 할 정도로 전 남자친구는 완전히 게임에 빠져 있었다. 가히 게임 덕후라고 할만했다. 소심한 성격의 그녀는 이 모습을 몇 년간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동네 친구였기에 자연스러운 만남이 되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와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하자는 대로만 따라오던 그녀도 조금씩 자기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 두 번, 세 번도 만나기도 했다. 내가 먼저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 전에 그녀에게 먼저 연락이 와서 약속을 잡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개팅 결과가 아주 좋은 쪽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 않은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고백할 타이밍이 올 테고 지긋지긋한 싱글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데이트가 조금 길어졌다. 술도 많이 마셨고 그녀도 취한 것 같았기 때문에 평소처럼 집에 바래다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녀는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평소 안 가던 노래방에 가자고 하질 않나, 술을 더 마시고 싶다고 하질 않나, 뭔가 시간을 자꾸 끄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기다리던 타이밍이 온 것이라고! 연애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나는 미련공탱이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이리 머뭇거렸는지 모르겠다. 가까워질 기회가 있었는데 자꾸만 망설였다. 과감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방을 가고 술집을 여러 차례 옮기면서 시간만 헛되이 흘려버리고 있었다. 평소 헤어지는 시간보다도 오랜 시간이 지난 새벽에 다 와서야 그녀가 집에 가겠다고 했다. 아마도 체력이 다한 모양이다. 집으로 바래다주면서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서 잠시 잠이 들었었다. 그렇게 긴 데이트는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평소와는 다른 심각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왜 그때는 눈치가 그리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평소처럼 이쁘게 차려입은 그녀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뒤에 집에 가겠다고 했다. 헤어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이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무거운 목소리로 전 남자친구가 다시 연락이 와서 나와 더 이상 못 만나겠다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 잘 만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나와 만난 것은 뭔데 이렇게 쉽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자고?


그녀와의 마지막은 지하철 역이었다. 집으로 가는 그녀의 손을 잠시 잡았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게 실은 믿기지 않았다.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좀 더 일찍 고백을 했어야 했나? 자주 만난다는 것에 너무 방심한 것은 아닌가 하며 나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와 짧았던 몇 개월의 인연은 끝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소식을 들을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뒤의 일이었다. 주선자였던 친구에게서 근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주선자에게는 그저 헤어졌다고만 말했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녀가 다시 게임광 전 남자 친구에게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투덜거리며 했다. 그러자 주선자가 말했다. 


"어? 그 친구 옛날 남자 친구 안 만나는데?"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행동이 답답했던 그녀는 초강수를 둔 것이었다. 전 남자 친구가 다시 만나자고 하면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잡을 줄 알았었나 보다. 하지만 난 너무도 쉽게 그녀를 놔줬고 그녀는 이것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미련 공탱이 같은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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