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어느 날 이런 제안이 왔다. 예전에 잠시 만났던 이성에게서 자신의 고향인 부산으로 놀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것도 당일 코스가 아닌 자고 가라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남자 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사이가 멀어진 상태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 것은 그린라이트일까? 아닐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린라이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잠시였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감정으로 만났던 여성이었기에 연락을 받자마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약속을 잡고 바로 부산행 기차를 예약했다. 바다가 보이는 부산에서 이성과의 하룻밤이라니... 이게 웬 행운인가 싶었다.
그녀와의 인연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자면 과거에 바에 놀러 갔다가 알게 된 아가씨였다. 당시에는 바텐더로 있었는데 바를 그만두고 나서도 내게 호감이 있었는지 주기적으로 연락을 했었다. 가끔씩 내가 다니던 회사로 와서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직장을 옮길 때면 자기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백할 타이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항상 주변에 남자친구가 있었으니까. 남자친구가 계속 바뀌긴 했는데 이상하게 내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대신 연락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장관리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사이였다.
약속 당일에 부산역에서 내려서 그녀의 차를 기다리는 동안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청심환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멀리 부산까지 이성을 만나러 내려왔다는 것이 희망을 부풀게 했나 보다. 거기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부산이다.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운전하는 차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상큼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좋아했던 그녀는 오토바이를 처분하고 착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모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어디든 좋았다. 그녀가 가려는 곳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이야기를 할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갑자기 누구를 태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차로 이동한 곳은 학원 앞이었다. 그곳에서 태운 것은 그녀의 친동생이었다. 성별은 여자,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된 아가씨였다. 동생하고 같이 봐도 되냐고 하는데 안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후로는 셋이서 돌아다니면서 저녁을 먹고 술도 마시고 늦게까지 즐겼다. 말이 즐긴 것이지 기분이 좀 묘했다고나 할까? 분위기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밤이 늦어서 숙소를 잡고 그녀와 작별을 고했다. 내심 동생을 바래다주고 다시 올게요를 기대했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숙소에서 애꿎은 맥주를 빠개면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해장하러 가자는 것이다. 점심으로 그녀가 사주는 해장국을 먹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로 보면 대체 멀리 부산까지 날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헤어지기 직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최근까지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청혼을 받았는데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서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도 원래는 남자 친구가 내려오겠다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나와의 약속을 핑계로 말이다.
당최 여자들의 심리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의미였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와줘서 고마웠다면서 다음에는 둘이 만나자고 하더라. 동생도 나를 좋게 봤다나 뭐라나... 그래,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라는 희망을 안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 부산행은 2주 뒤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른 지인을 통해 나중에야 안 사실은 그다음 주에 남자 친구가 부산으로 내려와서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지금은 둘이 결혼해서 동남아에 가서 살고 있다. 여전히 그녀의 심리에 대해서는 궁금한 생각이 든다. 나를 왜 멀리 부산으로 불렀으며 그렇게 금세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것이었으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둘이 만날 때 동생은 왜 함께 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인연은 미스터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