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새벽 오징어 사건 이후(오징어의 꿈 1편 참고)에도 만남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어야 했는데 다시 말하지만 당시의 나는 지금처럼 공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나만 잘하면 별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태였는지, 왜 새벽에 나를 불러냈는지에 대한 공감이 전혀 안되던 상황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그녀는 헤어지려고 하니 자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를 못 가게 잡았다. 그녀 집 주위를 몇 번을 돌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미리 알아차릴 정도의 감은 당시의 내게 없는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참 아쉬운 상황이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힘든 처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공감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첫사랑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징어에 이어 동네 몇 바퀴까지... 그녀는 내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고 나는 찰떡같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쯤 되니 그녀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았다. 여전히 만남은 계속되었지만 예전의 살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그녀와 데이트 도중에 그녀의 지인을 만났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동네 치킨 집에서 치맥을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지인이 치킨 집에 우연히 들어왔다. 내가 나서서 말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나를 자신의 사촌 오빠라고 소개한 것이다. 함께 자리를 하는 내내 뭔가 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를 부끄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일로 인해 내 마음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나 보다. 만남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뭔가 의무적으로 만나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이 그런 것을 보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정적인 일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벌어졌다.
그래도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기에 나름대로 이벤트를 준비했었다. 공연도 보고 선물도 주고 저녁에는 맛난 음식도 먹는 것으로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놨었다. 이번 만남으로 다시 가까운 사이로 돌아가고 싶은 기대감도 있었다. 불행히도 일은 내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에 그녀에게 약속을 파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신경 써서 준비한 이벤트가 깨진 것은 둘째 치고라도 전날도 아닌 당일 아침에 약속을 깨는 것은 평소 약속을 중시하던 내게는 이별 통보와도 같은 일이었다.
이후로 내 마음도 차게 식어 버렸다. 그녀에게 몇 번의 연락이 왔지만 받지 않았다. 회사까지 찾아온다는 문자에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차가운 답을 보냈다. 몇 번의 문자 끝에 그녀도 포기한 것 같았다. 첫사랑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많은 포인트를 내가 놓치고 있었다. 그녀의 신호를 제대로 답을 못한 것이 첫째요. 불만이 있으면 표현을 했어야 했다. 혼자 마음속으로 삭이고 있어서는 문제만 악화시킬 뿐이다.
첫사랑의 저주일까? 이후로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잘 만나던 이성과도 깨지는 악습이 반복되게 된다. 더 이상 내게는 크리스마스가 축복의 날이 아니었다. 저주의 날로 변해버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은반지는 까맣게 변해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