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오늘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해왔던 소개팅 중에서도 가장 큰 후유증을 가져왔던 것 중에 하나이다. 그만큼 상대를 믿었고, 잘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고 너무도 허무하게 끝이 났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마저 흔들려버리는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를 만난 것은 회사 대표님의 소개 덕분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던 시기에 대표님과 함께 거래처에 미팅을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와 같이 회의를 했던 아가씨가 그날따라 왜 이리 이뻐 보이던지... 호피무늬 치마가 눈길을 끌었다. 미팅을 잘 마치고 그 후로도 몇 번 일 때문에 만나기는 했었는데 호감이 가긴 했지만 일적으로 만나는 것이라 마음을 두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대표님이 그 아가씨랑 소개팅을 해보지 않을래?라고 묻는 것이다. 안 그래도 약간의 호감이 있던 차에 마다할 리는 없었다.
12월의 어느 날 대표님의 주선으로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대표님은 우리 보고 잘해보라고 말하고 떠났고 그녀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와인을 곁들여 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첫 만남이 아닌 일 때문에 몇 번 본 사이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도 내게 아예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긴 시간을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 애프터를 신청했고 이후로 몇 번을 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관계에 큰 진전은 없었다.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던 상황이라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우리 사귀는 것은 어떠냐고? 그랬더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다시 며칠을 기다렸다. 답답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가고 돌아온 대답은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거절도 승낙도 아닌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아예 차인 것은 아니었기에 희망을 가졌다. 설마 그 기다리라는 시간이 1년이 될지는 그때는 몰랐었다. 이후로 일을 하러 가면서도 만나고 따로 식사와 술을 하면서 만나기는 했지만 사귀는 것은 아니었다. 자주 놀러 가다 보니 그녀 주변의 지인들도 우리가 만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지인들과 더 빠르게 친해졌다. 지인들도 이 정도면 우리가 사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도록 그녀는 답을 주지 않았다. 내가 만나자고 하면 거부를 하지는 않았는데 사귀자는 말에는 기다려달라는 답을 할 뿐이었다. 나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지인에게서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에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는 것이다. 전 남자 친구는 도박에 미친 자였다. 그녀의 돈을 몇천만 원이나 꿔간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가족에게는 그녀 때문에 돈을 쓴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전 남자친구의 누나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기에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연을 듣고 화가 났다. 그녀에 대한 측은지심이 들어서 더욱 잘해줬다. 그녀가 주말에 일할 때면 회사로 커피를 들고 방문하기도 했다. 만날 때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1년을 공들인 결과 완전히 사귀는 것은 아니어도 사귀는 것처럼 만나게는 되었다. 지인들도 축하해 주고 대표님도 축하해 줘서 잘되는 것으로 알았다. 비록 그녀와 내가 사는 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장거리 연애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사귀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의 만남은 10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이때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엄격하셔서 10시면 집에 들어가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말에 일하는 그녀를 응원하려고 간식을 사들고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에 기습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는데 그녀가 깜짝 놀라며 폰을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액정에 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는 오빠이거나 친척 오빠라고 생각했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은 있었지만 지금 잘 만나고 있는데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이후로 며칠 뒤에 그녀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다. 뜬금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며 나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공부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니? 믿도 끝도 없는 이별 통보에 어이가 없어서 그녀의 지인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 한참을 뜸 들인 끝에 지인이 이야기해 준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녀가 다시 그 못된 전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것이다. 지인들도 뜯어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만난다는 것이다. 그럼 그때 액정의 남자가 바로?
심지어 나와 만날 때도 그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집에서도 그 남자를 반대했었기에 나와 만난다고 핑곗거리를 만들어 두고 나와 10시까지 만나고 그 남자와 그 이후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야 말고 난 그들의 방패막이가 된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충격에 빠졌었다. 대체 그녀에게 난 무슨 의미였다는 말인가? 1년이 넘도록 공들인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때 알게 된 것은 인연이 아닌 사람은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 도박쟁이 남자와 다시 만나서 어떻게 됐는지는 결과를 알지는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사람은 이렇게 때로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면이 있다. 도박쟁이인 전 남자친구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스스로 인생을 지옥으로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이제는 측은 지심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논 업보는 그녀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