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평온한 어느 날 오후였다.
갑자기 친척 어르신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하는 이야기가 소개팅을 하라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 테니 여기로 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갑작스러운 소개팅이 은근히 성공률이 높다는 상상에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친척 어르신이 주선하는 자리인지라 부모님도 알게 되신 탓에 내게는 거부권이 없기도 했다.
그날따라 왜 이리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지...
우산을 들고 약속 장소에 서 있는데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는 기분이 다운되는 나였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친척 어르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왜? 그 옆에는 비슷한 또래의 여성 2명이 함께 오는 것일까?
설마 저 어르신들이 내 상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의 부모님 뻘인데 내 상대가 될 리가...
그렇다면 대체 내 상대는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알고 보니 나를 소개해 줄 상대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함께 오는 여성분은 그분의 친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돼서 잠시 내 생각이 정지되어 버렸다.
선도 아니고 소개팅인데 정작 상대는 없고 상대의 어머니부터 만나야 한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인가?
친척 어르신은 A, 상대 어머니는 B, 친구는 C로 지칭하겠다.
A와 B와 C는 테니스 동호회의 회원이라 했다.
테니스를 치면서 친해진 와중에 B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는 것을 보고 A가 소개팅을 주선한 것이다.
B도 딸이 연애할 생각도 없고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아서 답답하던 와중에 A의 제안을 덥석 받아버린 거다.
그렇다면 왜 당사자는 안 나왔냐고?
B가 직접 상대를 보고 싶어서 나온 것이라 했다.
이 무슨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처음 보는 어르신을 두 명이나 내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말이다.
여기서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어야만 했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답답하게도 그 자리를 지켰다.
처음 보는 어르신 2명과 이야기를 하는 내 느낌음 마치 높은 단상 아래서 취조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질문에 성실히 응해야만 했다.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B는 진심 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으니까.
당시의 나는 이성들에게 인기는 별로였어도 어르신들에게는 그럭저럭 통하는 외모이기도 했다.
덕분에 첫인상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이번에는 또 다른 어르신이 등장하게 된다.
역시 테니스 동호회 회원으로 남자였다.
편의상 D라고 하겠다.
D는 등장하자마자 또 내게 질문 공세를 펼쳤다.
뭐 그리 궁금한 것이 많은지...
3명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제 질문거리가 떨어졌는지 A부터 D까지 나를 놔두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대체 평소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식으로 고문을 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참만에 그들은 비도 오는데 술 한잔하자며 자리를 떴다.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는데 이번만큼은 거절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게 해방의 순간이 온 것이다.
B는 그래도 날 좋게 본 모양이다.
딸과 약속을 잡으라며 연락처를 건네줬다.
무려 2시간의 취조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그래도 노력이 성과를 본 것일까?
며칠 뒤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한 번에 거절을 당했다.
애초에 그녀는 소개팅이고 뭐고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소개팅 자리에 나온 것도 나를 소개할 명분을 만들 속셈이었던 것이다.
보란 듯이 거절당하고 말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
어르신들의 면접은 통과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한 번에 거절을 당했다.
이후로 친척 어르신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그분도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