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마사 Sep 04. 2024

난 미끼였나?

소개팅 필패의 역사

소개팅을 하다 보면 가끔 내 상식밖의 일이 일어나곤 한다. 이번에 말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 중에 하나이다. 소개팅을 하고 애프터를 거절당하지 않고 7번을 만났다. 이 정도면 누구나 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 역시 그런 생각이었다. 이번만큼은 잘 되고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나은 직장에 키도 컸다. 나와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성격도 좋고 이야기도 잘 통했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그동안 지겹도록 겪어 봤었다. 아무리 소개팅 자리에서 분위기가 좋았어도 다음날 문자로 "좋은 사람 만나기를 바랄께요." 라고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애프터를 받아 준 것이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함께 술을 좀 마셨다. 술이 들어가니 이야기가 술술 나오더라. 그녀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이어서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었다. 세 번째도 만남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제는 고백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아무리 내가 소개팅에 약하다고 해도 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세 번째 만남은 연남동이었다. 1차로 만두 맛집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2차 장소로 이동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왜냐하면 3차로 예약한 분위기 좋은 와인샵에서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설레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고백의 타이밍이 다가왔다. 와인으로 알딸딸해진 상태에서 사귀자고 고백을 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무반응이었다. 거절도 아닌 승낙도 아닌 무대응이었다. 무대응은 거절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들떴던 기분은 사라지고 간신히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을 가진 채로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잘 들어갔냐고, 어제는 즐거웠다고 안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어제의 무반응은 승낙의 의미였다는 말인가? 이후로도 잘 만난 것을 보면 나로서는 그날 고백이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그런 생각을 더 짙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마침 그때는 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누룽지 백숙 맛집으로 갔다. 평소에 그녀가 가족과 잘 가는 곳이라는 말과 함께... 누룽지 백숙뿐인가? 커피를 마시는데 선물까지 챙겨줬다. 이쯤 되면 진짜 사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아무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대답은 같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좀 더 자신감을 갖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사귀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이번에는 그녀의 생일 차례였다. 신기하게도 내 생일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은 날짜에 그녀 생일이 있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고백하자는 생각에 꽃다발도 준비하고 생일 선물을 정성 들여 준비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되었다.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2차로 술을 마시는데 평소와는 달리 그녀가 집중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회사나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았다. 자꾸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몇 번을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한참만에 나온 대답은 친구들이 자신의 생일을 위해 모여 있어서 신경 쓰이니 가봐도 되겠냐는 것이다. 이미 고백을 위한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러라고 했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택시를 타러 가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밝아 보이던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평소에는 답이 바로 왔었는데 그날따라 답이 없는 거다. 메시지도 씹고 카톡도 씹었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녀의 카톡 프사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웬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있었다. 동네 친구가 있었는데 40이 되기 전까지 상대가 없으면 결혼하자고 약속을 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때는 그냥 넘겨 들었었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 이 남자가 그 남자구나 하는 깨달음 말이다.


결국에는 그녀는 몇 개월 뒤에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당연히 내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짐작하건대 나와 사귀는 것처럼 보여서 그 남자를 조급하게 만든 것 같다. 결국 나는 미끼로 이용당한 셈이지. 이제야 왜 내 고백에 그녀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생일 선물을 받았으니 아예 손해는 아니려나?

이전 03화 심판대의 그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