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필패의 역사
그녀의 첫인상은 뭔가 많이 지쳐 보인 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하는 일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데다 가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 보니 이런 생활을 한지도 오래되었다고 했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그녀의 일에 대한 욕심은 대단했다. 잠은 제대로 자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소개팅을 펑크 내지 않고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여기서 잠깐, 그녀와 만나는 데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래 내가 그녀의 소개팅 상대는 아니었다. 원래 소개를 받기로 한 동생이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내게 순서가 넘어온 것이었다. 소개팅 날짜를 잡는데도 한 참이 걸렸었다. 소개받기 전에는 몰랐었는데 소개를 받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주일 내내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소개팅 나올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용케 시간을 내줬고 나와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성격은 모나지 않고 괜찮아 보였다. 이야기도 크게 어긋남이 없이 잘 진행되었다. 외모도 참하니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라 애프터를 신청했다. 웬일로 바로 차이지 않고 다음 만남이 성사되었다. 문제는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호감이 있어도 자주 봐야 진행이 되는데 한 달에 한 번을 보기가 힘들다 보니 제대로 진행이 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정리를 했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을 봐서는 이게 사귀는 것인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애매모호한 관계였는데 그걸 또 인내하고 있었으니... 결국에는 1년이란 시간 동안 그녀와의 만남이 이어지게 되었다. 말이 1년이지 실제로 본 것은 12번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해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전화는 거의 받지 않았고 문자는 한 참만에 답이 왔으니까.
한참만에 답이 왔는데도 그걸 또 좋다고 신나 했던 내 과거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녀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파주 헤이리에 놀러 갔을 때다. 웬일로 하루종일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약속 당일날 내 차를 타고 헤이리에 갔다. 헤이리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차를 마시면서 마침내 고백이란 것을 해봤다. 당시에는 고백도 못하고 차였던 일이 비일비재해서 내심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대답은 뜨끈 미지근했다. 승낙도 아니고 거절도 아닌 중간정도의 느낌? 그렇게 다시 애매한 만남이 이어지던 중에 연말이 되었다. 그래도 성탄절이니 관계에 진전이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고 만났다. 대학로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선물도 준비하고 고백 멘트도 준비했었다.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고백만이라도 받아줬으면 좋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이제는 그나마 띄엄띄엄 유지되던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문자도 전화도 안 받더라.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서 주선해 준 친구에게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한 달 뒤에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1년이나 만날 걸까? 이후에 연락을 못해봤으니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나와 연락이 끊기고 바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을 보면 나와 만나는 중에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만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1일 4 잡이라는 것도 핑계였을지 모른다. 이렇게 또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짐을 느끼면서 또 하나의 소개팅이 마무리되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사람은 참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미리 이야기해 줬으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