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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May 18. 2024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는 태어나면 안 되나요?

생명에 대한 새로운 고찰

로나의 백일이 되었다. 짐보리와 꾸시꾸시 브꾸시였나. 아동복 사이트를 들락날락 거리며 며칠 전부터 봐오던 예쁜 새 옷도 한 벌 주문했다. 꽃모자까지 달려 봄내음이 폴폴 날 것 같은데, 우리 로나에게도 잘 어울릴까. 신혼 생활을 시작하고 로나가 태어난 우리의 첫 집은 자그마한 2층짜리 타운하우스였다. 1층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TV를 보면 2층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로나가 잘 자는지, 깨어났는지 살피는 것이 어미의 일이었다. 첫 아이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우리 집 꼬마 아가씨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용했다. 생후 2개월부터는 옹알이를 하고, 자다 깨 배가 고프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야 했는데, 눈이 마주치면 조용히 방긋방긋 웃곤 했다. 일찍부터 통잠을 자고, 많이 울어서 엄마를 힘들게 하지도 않더니, 그저 순하기만 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뽀얀 식탁보 위로 하얀 콩고물이 보슬보슬 얹어진 백설기 떡이 등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과일과 풍선이 올려져 있는 백일상 사진이 다른 이들의 싸이월드에는 잘도 올라왔다. 미국 중서부, 한적하다 못해 심심하고 지루한 마을, 그래도 노을은 숨이 막힐 만큼 짙고 아름다웠던 그곳에서 맞은 우리의 첫 백일잔치는 고요하고 단출했다.


그럴 기분은 아니었겠지만 두고두고 내가 서운해할까 봐 그랬던 것 같다. 남편은 나가서 외식을 하자 했고, 우린 평소 좋아하던 일식집에서 식사를 했다. 로나는 카시트 바구니에서 방실거리다 잠이 들었고, 남편과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밥을 먹는데 옆 방에서 아이들 소리가 까르르 들린다. 어른들은 식사를 하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방 안을 휘저으며 뛰어노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미간이 찡 하더니, 눈물이 글썽거려 앞에 놓인 음식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꾸역꾸역 씹고, 삼켰다. 우리 방이 조용하니 아이들 소리가 자꾸만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건강하고 밝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뭐라고 뭐라고 쫑알거리는 아이들의 예쁜 말투. 무슨 맛인지도 모르게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우린 식당을 빠져나왔다.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다들 저렇게 건강한 아이를 잘만 낳아 기르는데, 우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우리가 연고 없는 곳에서 로나를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 무척 외롭고 슬펐지만, 한 걸음에 달려오지도 못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전화 저 너머에서 눈물을 삼키며, "언니, 잘할 수 있지? 로나는 좋은 엄마를 만났으니 건강하게 잘 클 거야" 한다. 아빠 목소리를 들으니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살다 보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더라.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있어. 괜찮아. 괜찮다, 우리 딸."


왜 나에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괴로운 질문이 마음속을 어지럽혔던 시간이 있었다. 나에게 질문을 하는 듯했지만, 하늘에 계신 그분께 계속 따져 물었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도 물었다. 몇 날 며칠 나를 괴롭히던 그 질문이 답을 찾기는커녕 평생 따라다닐 것만 같았는데, 신기하게 어느 순간부터 화선지에 베어 나는 수묵담채화처럼 점점 선명해지는 생각의 고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죄가 있어 그렇더냐. 왜 내 자식은 당연히 건강하고 똑똑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냐. 슬픔과 아픔은 모두 남의 것이고, 나는 왜 당연히 좋은 것만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더냐. 내 안에 숨어 있던 그 알량한 마음이 오만이고 자만이었음을 깨달았다. 아. 머리가 댕 울리는 것 같았다. 그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일이 나에게 온 것뿐이다.


오래지 않아 엄마의 손 편지가 도착했다. 말보다는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깊이가 있다고, 말수가 적었던 엄마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말은 글이 더 편하다고 하셨다. 동글동글한, 익숙한 엄마의 글씨체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로나를 한국에서 낳았더라면 어쩔 뻔했노. 네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병원에서 하는 그 수많은 검사를 다 했을 거 아니가. 그럼 우리가 로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 것이고, 얼마나 큰 번뇌에 쌓여 괴로웠겠노. 아기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고, 만약에 낳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겠노. 감사하자. 모르고 기쁨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하자. 얼마나 감사하노."




다섯 살인 로나를 데리고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 한 뒤 완전히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로나의 병원 진료와 중재 치료를 위해 장애 판정을 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 지방 대학 병원에서 심리 검사를 하고 의사를 만났는데, 이 놈의 의사 얼굴이 뭐 씹다 뱉은 표정이다. 자기 딴에는 표정 관리를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매우 불편하고 어색해하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비단 그 의사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다운증후군이라는 유전적 장애를 지닌 사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가 매우 부족하고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 사람은 의사가 아닌가.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의사가 된 전문가가 아니던가.


한국에서 셋째를 출산하기 위해 다닌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참 좋아하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내뱉은 한 마디가 그를 얼마나 깎아 먹었는지 모른다. 특이한 유전적 history를 지닌 자녀가 있으면 다음 아기를 낳을 때 산부인과에서 늘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셋째를 낳기 전 진료를 받으며, 미국에서 출산 후에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를 했더니, 이 놈의 의사가 망언을 했다. "그러니까요,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낫다니까요. 우리는 검사 다 해요. 검사하면 다 나오는데. 모르고 낳을 수가 없어요." 얼굴에 싸늘한 기운을 드리우는 기지를 발휘하지 못해 내내 아쉬웠다. 몸이 무거워 일어나지 못했고 용기가 없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 입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이 양반아, 당신 집에 있는 그 귀한 자식이랑 똑같은 내 자식이야. 똑같이 숨 쉬고, 먹고, 자고, 배우고, 사랑받고, 행복해할 권리가 있는 내 자식이야. 이 무식한 양반아. 당신이 의사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나든 둘이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라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이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 마음이 덜 하거나 없어지겠는가? 건강한 당신의 아이가 다치거나 병에 걸려 장애를 얻게 된다고 해서 아이를 눈앞에서 치우려 하겠는가? 그 사랑의 크기는 다르지 않다. 그 아이가 타고난 존엄성도 다르지 않다, 여느 건강한 아이의 그것과. 


"쟤 다운증후군이야" 또는 "공원에 다운증후군들이 있어"라는 식의 말은 잘못된 표현을 담고 있다. "그 아이는 다운증후군이 있어, " "공원에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라고 해야 한다. 다운증후군은 그 사람이 지닌 유전적 증상일 뿐이지, 그 사람을 온전히 표현하는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미국에서 로나의 장애를 알고 다운증후군에 관한 책을 몇 권 구입했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책의 첫머리에 용어의 올바른 사용을 언급했었다. 간혹 의사들이 편의상 Down kiddos (다운 아이들)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children/kids with Down Syndrome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표현이 맞는다.


요즘 한국에서는 다운증후군을 지닌 아이들을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태어나는 아이들 수가 많이 줄었나 보다. 출산 전에 철저한 검사를 하고 고위험군으로 판단이 되면 많이들 임신중절을 하는 것이다. 다운증후군은 유일하게 임신 중 찾아낼 수 있는 유전적 증상이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다운증후군을 지닌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감히 말하건대, 다른 자식과 다르지 않은 나의 자식이고, 이미 생긴 생명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우리에게 온 로나. 

우리가 미국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엄마, 아빠를 찾아 로나가 열심히 달려오는 동안 가장 기쁘게 맞을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품은 열 달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탄생을 보았다. 참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아픔과 슬픔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로나가 괜히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다. 


우린 운명이야, 로나야. 어서 와, 환영해. 엄마, 아빠에게 무사히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 




대문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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