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상상과 실제 (1) 프롤로그
4.11 순례길에 나서기 전 와이프와 함께 하게 된 사연과 의미 있는 순례를 위해 출사표처럼 썼던 글이다. 순례에서 돌아와 다시 읽어보니 떠나기 전 심정이 고스란히 떠올려진다. 연재글의 배경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대로 옮겨본다.
내일이면 드디어 오랫동안 내 버킷리스트에 담겨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난다. 은퇴 후 가장 먼저 하고 싶던 일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 거의 2년이 다 되어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도 여건이 모두 갖춰지지는 않았지만 앞뒤 안재고 2월 초에 파리행 비행기 예약을 했다.
그동안 내 버킷리스트 최상단에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와이프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최근 2년 두 번의 암 수술을 받은 와이프를 보살펴야 하기에 오랜 기간 동안 집을 떠나 먼 곳에 머무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작년 새해가 시작하던 첫 주에 암 병동에서 와이프를 간병하는 동안 은퇴 전 작성했던 버킷리스트도 수정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의 은총과 와이프의 강한 재활의지와 노력으로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감사하게도 다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올해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지난 잘못들의 용서를 구하고, 엄격한 절제가 필요했던 직장 생활을 잘 마무리 한 내게 영혼의 자유를 주고, 살아오며 감당 못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마음의 상처들을 보듬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앞으로의 삶에 의미 있는 빛을 찾는 여정에 나서고 싶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와이프가 함께 가고 싶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내가 먼저 가서 700Km를 걷고 나머지 100Km에서 합류해 같이 걷자고 제안을 했지만 시작부터 함께 하고 싶단다. 내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도 쉽지 않은 순례길에 와이프까지 보살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하니 막막해졌다.
그런데 내가 확답을 안 했음에도 와이프가 이곳저곳(특히, 목사님께)에 얘기를 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처음부터 함께 가는 게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함께 가는 준비를 하다 보니 예산도 준비할 것들도 많아졌다. 게다가 파워 J인 내가 파워 P인 와이프를 모시고 가려니 떠나기도 전부터 순례는 이미 시작되었다.(몇 달 전 와이프가 친구들과 다녀온 안동 나들이 일정표도 내가 만들어 주었다.)
혼자라면 파리행 비행기도 경유를 하는 저가항공을 이용할 텐데 와이프를 위해 직항 국적기를, 프랑스 길 생장 이동도 야간버스가 아닌 TGV를, 순례길에서의 숙소도 선착순 공립 알베르게가 아닌 예약이 되는 곳들을 찾아야 하고, 음식도 가려야 해 쉽지 않은 여정이 예상된다.(출발, 도착일 외에는 모두 상황에 따라 움직이려던 순례길이었는데, 와이프와 동행으로 숙소, 먹거리, 볼거리, 해 볼 것 등을 감안해서 계획표를 짜다 보니 무려 엑셀 5장짜리 패키지여행의 일정표가 되었다.)
홀로 가려 했던 순례길의 목표는 생장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모든 코스를 예외 없이 순례자처럼 완주하는 것이었다. 와이프의 속도에 맞추어야 해 원래 계획대로 되기는 어렵지만 모태 신앙인 와이프와 순례의 본래 의미도 함께 생각하며 걷은 것이 순례길의 깊이를 더 해 줄 수 있을 거라 자위해 본다.
전체 일정은 38일로 잡았는데 와이프 컨디션 등을 보며 연박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며 유연하게 대처하려 한다. 중도 포기를 하더라도, 완주를 못하게 되더라도, 걷는 동안은 순례길을 가려던 본래 취지에 집중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가능하다면 순례 증서를 받아 와이프에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안겨주고 싶다.
아무튼 새해를 암 병동에서 우울하게 맞이했던 지난해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순례길을 와이프와 함께 떠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순례를 마친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만, 욕심내지 않고 할 수 있을 만큼만 걸으며 순례길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좀 더 단단해지되 때로는 말랑말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 돌아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