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병원.
의사는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중간에 끊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뇌종양 수술, 코로나19 공무상 재해로 소송 중이고, 지금은 팀장 대행 업무에 세입자와의 소송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속에 웅크리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의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상태라면, 충분히 6개월 진단서 써드릴 수 있어요.
쉬셔야 합니다. 진짜, 쉬셔야 해요.”
처음이었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통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으로 바라봐 준건.
진단서를 받아 들고 병원을 나서는 길.
하늘에선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대한법률구조공단으로 향했다.
접수창구 앞, 직원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접수하셔도 몇 달은 대기입니다. 주택임대차 관련 소송이 워낙 많아서요···”
절망감이 다시 목덜미를 짓눌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근처 ‘길 법무법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데스크 직원이 말했다.
“지금 상담 가능하신 변호사님은 염상실 변호사 한 분 계세요. 상담 원하시면 바로 모실게요.”
그리고 덧붙였다.
“상담은 시간당 11만 원입니다.”
상담실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너머 앉은 변호사는 종이 몇 장을 넘기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소송까지 갈 사안은 아닌 것 같고요.
합의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소송 자체는··· 저희가 맡기 어렵습니다. 금액이 적고, 실익이 크지 않아서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덧붙였다.
“재판의 관건은 세입자의 이런 사정들을 미리 알고 있었느냐, 즉 ‘예측 가능했느냐’입니다. 몰랐다면, 특별손해로 다퉈볼 여지는 있는데···”
나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특별손해요?”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가능합니다. 입증은 원고가 하는 거라.”
그리고, 그 말.
“글쎄요, 아줌마가 이걸 직접 감당하시기엔 좀···”
‘아줌마.’
그 단어가 귓가에 박혔다.
한 번이 아니었다.
“아줌마, 이건 문서도 잘 정리하셔야 하고, 증거도 직접 찾아야 합니다. 법원 왔다 갔다 하면서 소명하실 수 있겠어요?”
나는 변호사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메모하다가, 손을 깍지 껴 움켜쥐었다.
그의 눈엔 지금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까.
수술로 어딘가 어색해진 몸, 감정적이고 무지한,
그리고···
소송도 제대로 못할 ‘아줌마’ 하나.
거울이라도 보고 싶었다.
내 몰골이 그렇게 초라한가.
그렇게 무가치한가.
‘하긴··· 마흔여덟에 뇌종양 수술, 직장 스트레스, 소송에, 그 와중에 생리 터지고, 비까지 맞았느니··· 그럴 만하지.’
하지만 나는 어금니를 꽉 다물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네. 할 수 있어요.”
변호사는 잠시 눈을 피했다.
공기의 결이 바뀌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상담료를 계산했다.
비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은 끈적였고, 생리혈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오후 세 시가 다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이쯤 되면 눈물이 터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멈춘 듯 고요했고, 그 속에 나만 홀로 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