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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서 한 장의 무게

by 루비하루

소장을 받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유명법무법인입니다.”

“저... 소장받고 전화드렸어요. 김무식 씨 보증보험 반환 청구소송건으로 연락드렸어요.”

“사무장님 연결해 드릴게요.”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뜸 “합의하시게요? 현재 저희 의뢰인이 요구하는 보상금은 1,000만 원입니다. 지연이자 포함입니다.”

그 말투는 나의 심장을 쿡 찔렀다.

그저 돈을 내고 물러날 사람으로 보는 듯한 어조, ‘예상 대로’라는 기계적인 말투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참았다.

가슴속 무력감과 억울함이 콧등까지 차올랐다.

그 순간, 지난 2년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병원 수술실 천장의 차가운 형광등, 청력검사실의 숨 막히는 정적,

고속도로에서 멈추고 싶었던 그날의 충동,

그리고··· ‘선배, 나 같으면 벌써 관뒀을 것 같아요’라는 후배의 말.

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합의 안 합니다. 소송으로 가죠. 저희도 변호사 선임하겠습니다.”

상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짧은 정적이 내겐 하나의 선언 같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무언가가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출근길,

창밖이 아닌 어두운 창에 비친 내 모습

눈은 퀭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쳐, 직장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정신과 진료를 예약했다.


첫 번째 병원.

“잠이 안 오고, 가슴이 자주 답답해요.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업무도, 재판도 감당이 안 돼요.”

의사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뇌종양 수술을 받으신 병원의 정신과와 협진해서 진료받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환자분의 상태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병원으로 향했다.


두 번째 병원.

진료실 문을 열며, 다시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공황 증상도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턱 막히고···

이젠 너무 두려워요. 업무도, 소송도···”

하지만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기록상 우울감은 있으나, 진단서 6개월은 곤란합니다.

3개월 정도만 가능하겠네요.”

나는 말없이 가방을 들고 나왔다.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6개월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했어.

인사팀에선 그 진단서가 있어야 내 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했어···’

복도 한편에 주저앉은 나는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단서 한 장.

‘그게 이렇게도 어려운 거였나.

이토록 아프고, 벼랑 끝인데...

증명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병이 아니라, 그저 무너지는 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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