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만 해도 이렇게 현실이 뻑뻑하게 돌아갈지 몰랐나 보다. 마음 드는 곳은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으리란 믿음에 낮과 밤을 다른 도시에서 보내는 일정으로 했다. 도시마다 살짝 맛만 보며 다시 올 때 넣을지 뺄지, 머무는 기간을 어느 정도 할지 정할 수만 있어도 충분하리라 생각해서다. 10년 넘게 다음 기회는 오지 않고 있지만. 도시마다 개성이 뚜렷한 북부 이탈리아를 패키지여행보다 꽉 차게 계획했다.
이산가족이 될뻔한 소렌토부터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까지 모두 눈뜨면 다른 도시로 떠날 채비를 했다. 도착한 날은 안 보면 후회할 것들을 해치우고, 다음 날 오전은 남은 아쉬움을 살짝 채워 넣고 떠나는 일정이었다. 소렌토에서 늦게 떠난 이유로 피렌체의 시간이 바빠졌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는 두 주인공의 관점에서 남녀작가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10년 후 피렌체 두오모 종탑에서 만나기로 한 이들의 결정은 잔잔히 흐르는 음악과 함께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없던 우리는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아오이’를 생각하며 오른 남주인공 ‘준세이’처럼 두오모를 뚜벅뚜벅 오르고 (중간에 사진 찍는 척 쉬면서 누른 카메라에는 기대 이상의 사진이 담겼다), 식사도 두오모 근처 피자집에서 대충 때우고 (그런데 맛집이더라. 아내는 그때 먹은 피자가 이탈리아에서 제일 맛있었단다), 필요했던 가죽가방도 얼떨결에 득템 했다 (아직도 가지고 다닌다). 모든 일정을 패키지여행 가이드가 물개손뼉 치며 엄지를 치켜들 정도로 완벽히 마무리하고, 늦은 시간 노천식당에서 여유까지 부리며 피렌체를 클리어했다.
피렌체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일까?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에서 계획에 없던 부라노(Burano) 섬이 집요하게 손짓했다. 여행책에 쓰여있던 ‘베네치아는 한나절 정도면 어느 정도 구경할 수 있다.’라는 문장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수상버스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인 알록달록한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내리니 모든 집들이 다채로운 색상으로 알록달록했다. 알록달록. 그게 다였다. 지금은 식당이나 상점들로 ‘여기도 자본주의로 알록달록해졌소’하며 관광객을 유혹하지만, 당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건 한가로이 누워있는 고양이와 그 위로 날아가는 갈매기 정도였다.
오픈한 식당을 찾지 못해 본섬으로 가는 수상버스 경유지인 폰타 사비오니(Punta Sabbioni) 선착장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이곳도 맛집이더라. 이탈리아의 모든 식당이 맛집인 듯). 베네치아의 저녁 시간을 날려 버렸기에 밤을 누볐다. 골목골목을 돌아 찾아간 산마르코 광장 노천카페에선 마지막 노래가 연주되고 있었다. 하나둘 꺼지는 불빛과 함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무리한 일정에 놓쳐버린 베네치아의 밤이 아쉬웠다. 결국,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다음날 일정을 늘렸고 그만큼 밀라노 일정이 줄었다.
베네치아의 곤돌라와 수상버스에 밀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밀라노에서 갈 수 있는 관광지는 두오모 뿐이었다. 보름 넘게 유럽 여행을 한 우리는 열다섯 개 이상의 성당을 봤다는 얘기다. 내부로 들어가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석양이 지는 두오모 위로 올라갔다. 뾰족 튀어나온 첨탑 위에 성인으로 보이는 조각상들만 외롭게 서 있을 뿐, 관광객은 없었다. 두오모에서 내려가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없었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과유불급을 소리치며 점프 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