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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Sep 01. 2024

눈엣가시, 루체른

프랑스로 가기 전 루체른을 경유한 이유는 리기산이나 필라투스 산을 가기 위해서였다. ‘스위스는 산이지’라는 단순한 생각이 만든 일정이다. 인터라켄에서 루체른으로 이동하는 아늑한 기차에서 다음 여행지를 산으로 가는 것에 대해 물었다. 모두 영혼이 빠져나오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겨울 만도. 살짝 쉼표를 찍는 일정으로 정했다.


산행을 포기하니 여유롭다 못해 한가해졌다. 불에 타 일부 복원한 것이지만, 유럽에서 지붕 있는 다리로 가장 오래된 카펠교에 갔다. 다리 지붕 아래 그려진 그림과 다리 밖을 알록달록 장식한 꽃이 한동안 주변을 맴돌게 했다. 프랑스혁명 때 루이 16세를 끝까지 지킨 스위스 용병을 기억하기 위한 빈사의 사자상에도 갔다. 옆구리에 창이 꽂힌 채 방패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있는 사자가 애잔했다.

      

다시 카펠교가 있는 호텔 주변으로 돌아와 허기진 배를 달랠 곳을 찾았다. 어디선가에서 함성이 들렸다 이내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소리에 가까워질수록 기름진 요리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펍 분위기 식당이다. 어두운 벽면은 길게 늘어진 휘장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형 스크린에선 축구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딴딴한 체격의 사내들이 함성의 주인공이었나 보다. 넋과 함께 경기에 빠져있었다. 유럽 리그를 보여 줄 것으로 생각하며 무심히 앉았다. 그런데 언뜻 비춰주는 유니폼이 낯익었다. 설마. 올림픽 축구 경기였다. 그것도 대한민국 대 스위스전.

     

여행 동안 런던 올림픽에 관심을 둘 수 없었다. 저녁에 들어오면 다음 날을 준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시차가 나지 않으니 밤에 열리는 경기도 드물고, 한두 시간이 넘는 경기를 한가롭게 볼 수도 없었다. 공교롭게 Part 1을 완결하고 쉬는 동안 열렸던 프랑스 올림픽 역시 한 경기도 못 봤다.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식구들 생일을 챙기고, 시애틀에서 온 친구를 만나고, 간단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정신없이 바빴다. 런던 올림픽 때처럼. 한해 한해 지날수록, 나에게 집중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다.

    

올림픽 일정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만난 행운이었다. 적지에서 보는 경기의 특별함이란. 붉은 상의에 파란 하의가 태극 문양을 연상시키듯, 하얀 상·하의에 적색 포인트 유니폼도 스위스 국기를 떠오르게 했다. 국가를 대표하며, 국기 문양 옷을 입고 경기하는 모습은 전쟁이었다. 뭐 응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적으로 보이는 이와 마주 보며, 창과 칼로 고기를 쓱 잘라 질겅질겅 씹는 풍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로 앞에 놓인 맥주가 마구 줄진 않았다. 혈중알코올농도와 함께 혈압이 급상승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한순간에 훌리건으로 변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반전 1대 1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반대되는 리액션을 과격하게 보였으니, 그들의 합리적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을 거다. 티 내지 말고 즐기자는 생각과 다르게, 본능적으로 나오는 리액션은 그들에게 성가신 가시가 되었다. 얼마 후 김보경의 발리슛이 골대를 흔들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승리에 가까워질수록 예비 훌리건 앞에서 자극할 용기가 사라졌다. 조용히 웃으며 숙소에 들어가 마지막을 즐겼다.

     

승리의 여운과 함께 카펠교를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삼각대에 올려놓고 타이머를 맞춰 한 방, 두 방. 장난스레 표정 짓던 아들이 갑자기 눈물을 폭발했다. 오른손 검지를 쥐고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혀 어지간히 성가시며 아팠나 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모두 웃음이 터졌다. 예비 훌리건도 이렇게 아팠을지 모르겠다. 잘 참았다. 훌리건. 잘 싸웠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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