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파리, 프라하의 공통점은? 오래된 얘기라 이걸 맞춘다면 비슷한 세대를 사는 분일 거다. 이십여 년 전 SBS 드라마 제목에 포함된 도시. <발리에서 생긴 일>을 시작으로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등. 지금처럼 넷플릭스를 비롯한 여러 OTT에서 쏟아져 나오는 작품 이름을 기억하기도 힘든 상황과 달리, 당시 드라마 제목에 포함된 도시의 이미지는 특별했다. 북유럽으로 가기 전에 프라하의 특별함을 놓치기 싫었다. 유레일 패스 기간이 남았기에 기차를 알아봤다. 파리에서 프라하로 기차 타고 한 번에 가는 방법은 없었다. 갈아타도 12시간 넘게 걸리는 일정이었다. 중간에 쉬어가는 곳이 필요했는데 선택지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그중 이름도 생소했던 로테르담을 선택했다.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을 포기하고 로테르담을 선택한 이유는 마리화나가 합법인 거리에서 풍기는 음지의 냄새와 갑자기 나타난 홍등가의 붉은빛을 아이들 머릿속에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리화나나 홍등가보다는 풍차에 대한 추억을 남겨주는 것이 부모다우니. 로테르담은 시골 풍차마을을 느낄 수 있는 킨데르데이크(Kinderdijk)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서쪽 끝 녹지로 우거진 Het Park에서 동쪽 끝 큐브하우스까지 빠른 걸음으로 삼십 분 정도 걸리는 로테르담 중심지는 걷기 좋은 곳이었다.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지만, 복원하기보다는 실험적인 건축물로 도시에 변화를 준 것이다. ‘저렇게 비대칭적으로 지어도 괜찮은 걸까?’ 걱정과 의심이 들게 하는 건축물 사이로 고풍스러운 빌딩도 보였다. 완공된 20세기말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단다. 그런데도 폭격을 피해 간 행운을 지닌 Westermeijer 빌딩이었다. 반 이상의 국토가 해수보다 낮거나 1m 미만인 네덜란드는 예전부터 토목이 발달했을 것이고, 지반이 약한 곳에 건축물을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축도 발달했을 것이다. 지진이 많은 일본 역시 건축이 발달한 것처럼. 눈길 가는 건축물이 툭툭 튀어나와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여러 개의 노란 큐브가 반쯤 쓰러지듯 모여져 만든 건물이 보였다. 겉에서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구조가 안에 들어가 보면 꽤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창이나 밝았고, 경사진 벽면 때문에 생긴 높이 차이를 이용해 가구를 배치해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공간 자체가 다양해 지루하지 않았다. 높이가 낮은 곳에서는 아늑함까지 느끼게 해 줬다. 겉과 속이 다른 건물이군.
다음날 킨데르데이크에서 만난 풍차도 겉과 속이 달랐다. 바람의 힘으로 물을 퍼 올리거나, 곡식을 가공하는 용도로 만들었던 풍차 안에서 사람이 살았었다.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큐브하우스의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그랬는지, 외부에서 예상하기 힘든 내부를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공간을 나눈 것이 큐브하우스의 18세기 버전 같았다. 척박한 환경에서 나름의 최적화를 찾아낸 듯한 공간. 뭐, 큐브하우스와 풍차가 지닌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외관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는 것. 잘 지은 건물 하나, 열 건물 부럽지 않겠다. 기대한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