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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Sep 29. 2024

베르사유 하이힐

몽생미셸을 다녀온 뒤 다시 느린 여행이 시작됐다. 외곽에 숙소가 있었기에 조식 먹고 출근하듯 나가, 그날 정한 관광지를 일하듯 돌아보고 퇴근하는 일정. 한 달 동안 지속된 여행이 적응될 만도 한데, 오랜 여행에 살짝 지친 면도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돌아다니며, 생각보다 작은 모나리자가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에 둘러싸여 관심받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에펠탑 전체를 어떻게 하면 담을 수 있을지 여러 위치와 각도에서 찍어 보기도 했다. 기차역에서 은퇴하고 미술관의 삶을 사는 오르세를 통해 은퇴 후 삶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는 건 과거형보단 현재형으로 쓰는 게 맞겠다).


예술가의 언덕인 몽마르트르에 올랐을 때, 세네갈 국기 색의 손목 보호대를 찬 세네갈 출신으로밖에 볼 수 없는 축구예술가가 가로등에 올라 있었다. 가로등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현란한 발기술, 손기술로 가로등 축구를 보여줬다. 공을 떨어뜨리면 창피함도 있겠지만, 다시 그걸 주워 들고 가로등에 올라와 분위기를 다 잡고 시작해야 할 것 생각하니 내가 다 힘겹게 느껴졌다. 이걸 아는 그도 필사적으로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넋을 빼고 쳐다보는 동안 다행히도 공이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몽생미셸의 오믈렛을 통해 익혀진, 경험에 충실한 식사는 푸아그라와 달팽이 요리에도 이어졌다. 면세점보다 싸다는 아내의 감탄사를 못 들은 척할 수 없어 처음으로 명품 가방을 생일선물로 샀다. 종종 여행 중에 메고 다닌 기억이 나니, 실용적이며 비싸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종종 써먹을 수 있었다. 불리하게 상황이 돌아가면 “와, 그래도 생일날 파리에서 명품백도 사줬는데.” 한마디면, 어이없어하는 표정과 헛웃음이 나를 쏘아대던 날카로움을 무디게 했다. 아쉽게도 유통기한은 짧았지만.


에펠탑이 보여도 카메라에 손이 가지 않게 될 무렵, 베르사유로 향했다. 오전 일찍 서둘렀는데 긴 줄이 몇 번은 꼬여있었다. 기다림이 끝나갈 때 나타난 황금색 철문은 궁전 안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3만여 명이 50여 년의 시간을 쏟아부은 결과물은 얼마나 화려할까? 어떤 놀라운 모습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끄는 걸까? 한껏 부풀려진 기대와 함께 들어선 전쟁 갤러리에 있는 구조물은 기대를 넘어섰다.  황금 장미 모양이 떠오르는 커다란 조형물과 색동저고리를 연상시키는 우주선 같은 조형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루이 14세 취향이 꽤 독특했군. 이런 조형물을 궁에 만들다니.’ 생각보다 파격적이었다. 다른 공간으로 들어서는 코너에는 하트가 연상되는 빨간색 조형물이 달려있었다. ‘이건 꽤 감각적이군. 왕비를 위한 것이었나?’ 왕비의 침실 옆 식당에는 사람만 한 바닷가재 두 마리가 식탁을 장식하고 있었다. ‘저렇게 식탁을 차지하면 식사는 어떻게?’라는 생각과 함께 ‘뭐야. 이거 뭔가 전시 중인 것 같은데?’ 심증은 거울의 방 끝에 수많은 냄비로 만든 사람 두 배 높이의 하이힐을 보는 순간 확증으로 변했다.


짧은 시간 자유롭고 다양한 파리 문화를 접하다 보니, 설치 미술가 조안나 바스콘셀로스(Joana Vasconcelos)의 전시물을 예전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현대 전시물도 어울릴만한 궁이었고, 궁에 어울리게 만들어진 전시물이었다. 하이힐을 못 봤다면, 복도 한쪽을  우주선으로 장식한 초현대적 예술 감각을 지닌 루이 14세와 바닷가재 요리를 사랑한 나머지 가재 인형과 함께 식사하는 앙투아네트가 머릿속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편을 쓰기 전 유튜브로 파리올림픽 개폐회식 하이라이트를 봤다. 여러 논란이 있었다는 기사도 읽었다. 그럼에도 궁과 박물관에서 경기를 열고 에펠탑 앞에서 비치발리볼을 하겠다는 자유로운 생각이 결과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문화와 예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놀랍고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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