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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Oct 13. 2024

카를교의 비극

한강(노벨상 축하합니다)이 서울을 상하로 나누듯, 블타바강이 프라하 중심을 좌우로 나누고 있다. 좌측의 프라하성 주변과 우측의 구도심을 연결하는 다리 중 카를교가 가장 유명하다. 교각 위에 세워진 30개의 동상 덕이다. 그중 항상 인파로 둘러싸여 있는 것은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이다. 신부였던 그는 어느 날 왕비의 고해성사를 받았다. 보헤미아의 왕인 바츨라프 4세는 왕비의 부정을 의심해 고해성사 내용을 그에게 물었다. 신부가 지켜야 할 비밀 유지를 위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왕 곁을 지키고 있는 개에게만 말하겠다고. 이 일로 그는 카를교에서 처형당했다. 당시 바츨라프 4세가 대주교와 대립하던 상황이었기에 극단적인 결정이 내려졌는지 모르겠다.

  

그가 던져진 위치에 동상이 세워졌고 밑단에는 강아지와 왕비의 부조상도 조각됐다. 손길에 닳아 구릿빛으로 빛나는 곳은 일단 만지고 소원을 비는 게 정답이다. 아이들과 아내가 강아지와 왕비를 만지며 소원 비는 모습을 찍는 동안 뒤통수가 따가웠다. 소심함에 “난 됐으니 다른 곳으로 가자.”라며 쿨한 척 방향을 바꿨지만, 스치듯 만지며 소원이라도 빌었어야 했나 보다. 아무 탈 없이 이번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로테르담을 떠나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숙박을 해결하며 이동할 수 있었다. 아니 숙박할 시간에 이동했다가 맞겠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열차의 소음은 침대 기둥을 타고 이 층 침대로 올라와 한 번 더 증폭돼서 귓속으로 들어왔다. 소음에 적응될 무렵 쓸데없이 부지런한 새벽 햇살이 얇은 눈꺼풀을 통과했다. 보약 같은 잠을 뺏겼다.


다행히 카를교 인근에 숙소가 있었다. 카를교를 뒤로하고 나는 구도심 숙소로, 아내와 아이들은 다리 건너 반대편으로 갔다. 몸살감기였을까? 식은땀에 침대 속으로 녹아들듯 몸이 가라앉았다. 선잠을 자면서도 남은 여행을 위해 빨리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준비해 온 비상약을 과할 정도로 먹었다. 가장의 무게는 결정할 일들로 가득 찬 여행길에서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조금씩 나아질 무렵, 먹을거리와 기념품 인형을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식구들이 들어왔다. 프라하성과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보고 왔단다. ‘내가 없어도 세상 아니 가족은 잘 돌아가는군. 내일이면 지금껏 해 온 것처럼 다시 완전체로 움직일 수 있겠지.'  

  

밤낮이 바뀌어 버린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식구들 숨소리가 열차 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머릿속으로 침대 위에서 맥없이 보낸 낮을 보상해 줄 대상을 찾았다. 떠오르는 건 카를교였다. 가깝기도 하고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간에 관광객도 없을 테니 사진 찍기 좋은 환경이라 생각했다. 낮에 포기해 찜찜했던 네포무츠키 동상 아래서 소원이라도 빌어야겠다고. 카메라와 삼각대를 조심스레 챙겼다.


술에 취해 벽에 머리를 기대고 벽과 대화하듯 흐물흐물해진 사람들이 보였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기운이 돌 때면 로마에서처럼 오른손에 들려있는 삼각대를 힘껏 움켜쥐었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카를교에 다다랐을 때 그제야 겨우 새벽 공기의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간혹 카를교를 지나는 술 취한 이도 있었지만, 교각 위 동상들이 지켜보고 있는 기분에 긴장되지 않았다.


가로등이 밝히는 카를교 중심에 혼자만 서 있었다. 가족들이 이미 다녀왔기에 이번 여행에선 갈 수 없게 된 프라하성을 아쉬움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물 위에 떨어진 파란 잉크색처럼 하늘색이 변해갈 때, 아침까지 혼자 여행해 보자는 욕심도 들었다. 마침 멀리 구시가지 너머로 떨어지는 유성도 찍혔다. ‘이렇게 완벽할 수가! 이런 풍경을 선물해 주기 위에 작은 시련이 있었나 보다.’ 황홀감에 빠져 있는 순간, 삼각대 위에 올려 있던 카메라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 안 되는데…….’ 미쳐 손을 쓰기도 전에 느슨하게 조여있던 삼각대가 카메라와 함께 카를교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여행을 담을 하나뿐인 카메라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 떨어지는 유성에 소원이라도 빌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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