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교에 엎어져 빤히 바라보는 카메라에 다가갔다. 액정이 깨지고,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렌즈는 이상 없었다. 다음날이면 프라하를 떠나야 했기에 수리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버렸다. 설령 오래 있는 곳에서 맡긴다 해도 길어야 일주일이었고, 한국처럼 바로 처리할 리 만무했다. 렌즈가 분리되는 DSLR 카메라였기에 본체만 살지,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살지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 식구들을 여행지로 보내고 숙소에서 알려준 장소로 찾아갔다. 결국 프라하에서 제대로 만든 추억은 없었다. 같은 여행지에서 서로 다른 기억과 추억이 생겼다. 함께 여행한다는 건 같은 추억을 만드는 것인데.
용산 전자상가 단층 형태의 골목길에서 익숙한 카메라회사 로고가 나타났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수리 기간은 3주. 카메라를 사는 것도 한국보다 비쌌다. 다른 물가는 싼 편인데 꼭 사야 하는 카메라만 왜 비싼 건지.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에 공항 면세점을 들를 수 있었다. 더 저렴할 거란 기대로 간 뮌헨 면세점은 프라하보다 비쌌다. 잘못 하나 없는 프라하에 투덜거리며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샀다.
코펜하겐은 가성비 때문에 선택한 곳이었다. 누구나 적용된다기보다 개인적인 상황의 가성비다. 노르웨이 베르겐으로 가는 도중 24시간 이하의 스탑오버를 이용해서 들릴 수 있었다. 세계 일주 프로그램은 24시간 이상 스탑오버하는 곳을 일곱 곳으로 제한한다. 그 일곱 곳에 포함되지 않고 올 수 있는 곳이다. 쉽게 말해 공짜 비행기를 탄 거다. 마음 편히 먹으면 망가진 카메라 값은 이미 뽑았다고 볼 수 있는데, 새로 산 조금만 카메라를 꺼낼 때마다 마음도 조그매졌다.
식구들이 신경 쓸까 봐 의식적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가성비 하면 빠지지 않는 코펜하겐 카드를 충분히 사용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코펜하겐 카드 하나면 모든 여행 일정이 해결됐다. 박물관, 미술관에서부터 세계 최초 놀이공원인 티볼리파크에다 시내를 관통하는 유람선까지. 24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가느냐에 따라 카메라값을 한 번 더 뽑을 수 있을 정도였다. 빽빽한 일정으로 정신없이 다니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 댔다. 조그만 카메라의 배터리도 정신없이 닳아, 결국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티볼리파크를 한컷도 찍지 못했지만.
코펜하겐의 금쪽같은 시간의 반이 지난 다음 날, 카메라 배터리가 충전될 때, 용케 마음도 충전됐다. 잠이 보약이란 건 마음에도 통했다. 이미 전날, 누릴 만큼 누린 코펜하겐 카드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아이들과 아내가 인어공주 상을 보러 가자 해도 셋만 보냈다. 이제 나만 남아 쉬는 것이 서로 익숙해지고 있었다. 혼자 짊어지고 있던 짐을 아내가 덜어준 거다. 몸과 마음을 조금 더 충전했다.
24시간이란 짧은 시간에 정이 들지 않을 것 같던 도시에서 치유를 받았다. 마음 쓰이는 일이 떡하니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더라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마음 저 구석에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는 것처럼. 새로 산 작은 카메라가 손에 익으니, 나름의 장점이 발견됐다. 먼저 작았기에 가지고 다니기 편했다. 무겁고 조작하기 복잡한 이전 카메라와 달리 아이들도 찍을 수 있어 아내와 단둘이 찍은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동영상 촬영이 쉬운 것도 좋았다. 결국, 문제는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결된 문제는 잊으면 되는 것이었고. 베르겐으로 떠나는 코펜하겐 공항에서 카메라 배터리를 하나 더 샀다. 마음이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