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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돈은 어떻게든, 라스베이거스

by 윤민상

라스베이거스는 미 서부 여행의 중심이었다. 동쪽으로 다양한 캐년이 있고 서쪽으로 요세미티와 샌프란시스코가 있다. 그런데 이 광활한 지역을 대중교통으로만 다닐 수는 없었다. 다행히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주에서 렌트한 차를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반납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만난 새하얀 쉐보레 트래버스는 열흘 동안 미 서부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말 아니, 발이 되어주었다.


라스베이거스에 카지노를 즐기러 간 사람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푹 빠져 있겠지만, 도박에 관심이 일도 없는 아내와 관심이 많아도 나이가 안 되는 아이들, 몇 년 전에 이곳에서 가진 현금을 다 바치고 카드깡까지 해본 나에게는 카지노를 제외한 다른 재미를 찾아야 했다.


고립된 사막에 지어진 이 특이한 곳에서, 관광지라 할 수 있는 곳은 호텔뿐이었다. 호텔마다 당연히 카지노가 있고, 분수 쇼와 화산 쇼를 공짜로 보여 주고, 카지노에서 받을 열을 식혀줄 수영장이 있다. 거기에 좀 무리를 한다면 모든 종류를 먹기도 힘든 고급스러운 뷔페에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O 쇼’ 같은 공연도 선택지에 있다.


한 상이 차려지면 보통은 맛있는 음식부터 손이 가는 습성을 지닌 나는 동쪽 캐논 지역으로 떠나기 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비싼 비용을 내고(카지노를 했다면 그게 가장 비쌌겠지만) ‘O 쇼’를 보기로 했다. 물의 서커스라고 할 수 있는 공연을 물이 튀는 거리에서 보는 것은 예상보다 큰 비용이 들었지만, ‘라이언 킹’이나 ‘오페라의 유령’처럼 잠들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음날,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는 습성을 지닌 나는, 수많은 경이로운 지역 중에 앤틸로프 협곡으로 가장 먼저 떠났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주와 앤틸로프 협곡이 있는 애리조나주는 같은 시간대다. 하지만 애리조나주 바로 위에 있는 유타주는 한 시간이 빠르다는 걸 몰랐다.


앤틸로프 협곡은 반듯이 나바호족 가이드와 동행해야 하고 예약제로만 운영된다. 예약한 시간을 놓치면 볼 수 없었기에 한 시간 정도 먼저 도착하게 출발했다. 그런데 유타주를 지나는 순간 예약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차 때문인 것을 몰랐던 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과속했고, 마침 반대편에서 지나가던 경찰차는 바로 유턴했다. 반대차선에서도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던 거다.


경찰차는 하얀 트래버스 뒤에 바짝 붙여 세워졌다. 두 명의 경찰 중 한 명이 차에서 내려 천천히 운전석 쪽으로 걸어왔다. 창문을 내리고 백미러로 그를 지켜보는 상황이 흔한 미국 영화의 어느 장면과 겹쳐 보였다. 굳었던 경찰의 얼굴이 차 안에 앉아있는, 누가 봐도 여행객이라 쓰여있는, 가족을 보더니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변했다. 그 미소가 기회로 느껴진 나는 차에서 내려 풍부한 보디랭귀지로 친밀감을 더해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운전석 손잡이를 당겼다.


살짝 열리려는 운전석 문을 힘차게 밀어 다시 닫은 경찰은 두 손을 핸들에 올리고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있으라 했다. 점점 영화 속 장면과 흡사해졌다. 그가 요청한 신분증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어떤 우호적인 방법으로 그를 설득할지 고민하다가, 그때도 시차 때문이었던 걸 몰랐던 나는 그냥, 마일을 킬로미터로 오해했다, 우리나라는 킬로미터가 기본 단위다,라는 구차한 이유만 댔고 그는 친절한 웃음과 함께 거액의 청구서를 내밀었다. 기대하지 않은 영화 같은 상황이 끝나고, 미 서부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앤틸로프 협곡을 가장 우울한 기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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