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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Jun 09. 2024

가우디는 외계인

스페인의 특색 있는 도시를 모두 포기하고 바르셀로나만 일정에 넣었다. 변덕스레 채널을 바꾸다가 건축 다큐멘터리만 나오면 리모컨을 내려놓고 끝날 때까지 지켜봤다. 여행에서 찍은 사진에는 대부분 건축물이 들어가 있었다. 사람을 찍어도 배경이 되는 건 자연이거나 건축물일 테니. 사진에 담는 피사체만으로도 건축물은 중요한 의미였다. 바르셀로나는 꼭 가야만 하는 거대한 세트장이었다. 가우디가 만든.


아테네에서 탄 비행기는 두 시간 만에 우리를 바르셀로나로 옮겨 놨다.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대화가 좀 빨라지고, 끊기지 않고, 스페인어처럼 들리고. 평생 한두 번 해볼 유럽 여행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할 수 있겠구나! 그들에게 아시아가 우리의 유럽이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좀 억울할 듯.


그리스가 천천히 예열하는 과정이었다면, 바르셀로나부터는 액셀을 밟고 힘차게 달려야 하는 출발지처럼 느껴졌다. 영어권이 아닌 곳에서 시작하는 부담감과 교통이 편한 카탈루냐 광장 호텔의 콧대 높은 가격 때문에 한인 민박을 선택했다. 한인 민박은 정보도 얻고 숙식을 해결하기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는 공간으로 되어 있어 아내는 불편해했다. 여행 일정 중 한 번만 이용하기로 한 조커 카드를 처음부터 사용한 거다.


“그 많은 곳을 다 가시게요? 아이들도 있는데. 몬세라트는 하루 일정을 꼬박 빼야 해요. 4일 중에 하루를. 바르셀로나만 봐도 4일이 부족할 것 같은데요. 이동하며 시간 보내지 말고 천천히 이곳을 즐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민박집에서 만난 K의 의견이었다. K는 우리가 계획한 여행 경로의 반대 방향으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혼자 여행한 지 두 달째인 K는 한식과 한국말이 그리워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K의 조언은 장기여행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말이라기보다, 바르셀로나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떠날 것 같은 걱정에서 나온 것 같았다. 빽빽하게 적힌 여행일정표에 K의 조언을 더 했다. 하나둘 빨간 줄이 그어질 때마다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그래! 느린 여행을 해보는 거야. 아쉬움이 남아야 다시 올 이유가 생길 테니.’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아이 눈높이에 맞춰진다. 부모의 눈에는 여행지와 함께, 여행지를 바라보는 아이 모습도 담길 것이다. 놀라워하고,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여행지도 덩달아 특별해진다. 두 아이 모두 미술을 좋아했다. 공부하는 미술이 아닌, 보고 느끼는 미술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피카소 미술관과 미로 미술관을 포함한 6개 미술관을 볼 수 있는 아트티켓을 구매했다. 그렇게 느린 일정이 정해졌다. 가우디와 미술관으로. 물론 밤에는 탱고와 샹그릴라.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 공원처럼 사람이 붐비는 곳은 아침 일찍 서둘렀고, 더운 낮에는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여유를 즐겼다. 힘겹게 얻은 카탈루냐 자치권을 스페인 내전으로 상실한, 프랑코 정권 시절의 작품들은 왠지 모를 암울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에서는 지금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모든 공간을 놀이터로 만드는 능력을 지닌 듯했다. 예술 작품을 몸으로 따라 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포기했던 여행지의 아쉬움이 지워졌다.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전날 아침, 내부 관람을 위해 예약한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갔다. 외관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130년이 넘게 남겨져 있었다. 녹아내릴 듯한 옥수수 모양의 독특한 외관을 지닌 서편과 현대적으로 해석된 간결한 모양의 동편이 대조를 이뤘다. 긴 줄을 따라 내부로 들어온 순간, ‘와!’라는 감탄사 말고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산토리니가 자연이 만든 모든 빛을 보여줬다면 이곳은 가우디가 만든 모든 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몽환적인 풍경에 적응이 될 때쯤 아들은 야자수를 형상화한 기둥에 붙은 타원형이 우주선의 조종석 같단다. 카사 밀라의 옥상에서 외계인을 만난 아들은 굴뚝 아래로 숨기도 했었다. 가우디의 상상력이 우주 끝까지 닿아 있는 듯했다. 그가 혹시 외계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바르셀로나의 느린 여행 주제로 정한 ‘가우디와 미술관’은 우연히도 ‘아들의 건축학과와 딸의 디자인학과’ 전공으로 연결된다. 가우디나 피카소만큼 천재적인 역량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저 바르셀로나의 건축물과 미술관을 놀이터처럼 즐긴 것처럼 각자가 선택한 일터에서 즐기며 생활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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