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회사에 독일사람이 있었다. 한국계 독일인인 P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 의대를 졸업한 P는 10여 년 전 회사에 입사했다. 의대에 합격했을 때 P의 부모님이 얼마나 기뻤을지를 생각하면 괜히 내가 다 뿌듯하다. P는 아시아지역 임원을 거쳐 한국 대표로 돌아왔다. 나는 퇴사예정자로 P는 구조조정 후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수장으로 식사 자리에서 만났다.
간혹 퇴사를 결정하면 다신 이곳에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도 있다. 예를 들면 평상시 보기 힘든 캐주얼한 복장에 면도도 하지 않고 말투에는 겸손함이 빠져있다. 난 잘 나가고, 잘 보내주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한다. 이번처럼 목돈 받고 나갈 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조금은 뻔하고 조금은 지루한 업무 얘기였지만 P와 대화하는 순간 머릿속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어느 도시로 가는 게 좋을까요?”
업무 얘기를 마친 뒤, 퇴사 후 세계여행을 떠날 계획인 걸 아는 P에게 물었다. 마지막 기억이 건조하게 남겨지는 게 싫었다. 환한 얼굴로 바뀐 P는 젊은 시절 독일에서 만든 추억들을 빠르게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돌아온 P는 말했다.
“음, 당연히 뮌헨이죠. 베를린에서 하는 역사 투어도 의미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는 여행은 아름다운 곳을 보고 오세요. 뮌헨을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퓌센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로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괜찮은 정보다. P가 강조하며 ‘당연히’ 가야 한다는 뮌헨이 이렇게 여행에 포함된 거다.
바르셀로나에서 탄 비행기는 또다시 두 시간 만에 우리를 뮌헨에 떨어뜨렸다. 유레일패스를 이용하는 기차여행의 시작이었다. 사흘 후 뮌헨에서 출발해 로마로 가는 야간열차를 예약했기에 숙소는 뮌헨으로 정했다. 이곳에서 기차로 각각 두 시간 거리인 퓌센과 잘츠부르크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했다.
최종 목적지인 퓌센의 작은 마을, 슈반가우(Schwangau)에 가기 위해서는 퓌센역에서 다시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역 주변은 파스텔톤의 고풍스럽고 정갈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텔과 식당 간판을 빼곡히 내세우며 이곳이 인기 있는 관광지임을 방증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백조의 성’이라 불리며 디즈니 성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유명한 노이슈반스타인(Neuschwanstein)성이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햇살에 반사되는 노란 성벽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호엔슈반가우(Hohenschwangau)성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유치원을 연상시키는 밝은 외관은 동화책 삽화에나 어울릴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호엔슈반가우성은 루트비히 2세가 열아홉 살에 바이에른의 왕이 되기 전부터 즐겨 찾던 여름 별장이었다. 그의 ‘보육원’이라 지칭할 정도다. 어린 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보다는 근대식 무기로 인해 군사적 가치가 상실된 성을 짓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어린 날의 기억이 그저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노이슈반스타인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두 개의 성을 더 지었던 그는, 폐위되는 수모를 겪었다. 수영에 능했던 그는 왕좌에서 쫓겨난 뒤 3일 만에, 유배지의 얕은 호수 위 익사체로 떠 오르고 만다. 41세라는 나이에 끝나버린 인생은 진실을 알 수 없는 자살로 마무리되었다.
루트비히 2세가 퓌센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호엔슈반가우성에 천천히 올라갔다. 작은 마을을 둘러싼 알프스산맥과 그 산들이 조금씩 흘려보낸 만년설이 녹아든 알프제(Alpsee) 호수는 평온함을 느끼게 했다. 세상 근심을 잊게 하는 어머니 품처럼. 루트비히 2세 그리고 P도 나와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성과 마을 이름에 포함된 슈반(Schwan)이 백조인 건 알고 있지?’라고 말하듯 이곳저곳에 있는 백조조각상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아기자기한 정원 사이로 밝은 표정의 아이들이 뛰놀았다. 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에 충실한 성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여름이 지나 뮌헨으로 돌아간 왕자의 머릿속에 이곳 풍경이 사계절 내 차지했을 것 같았다.
마을로 내려와 노이슈반스타인성으로 가는 방법을 찾았다. 호엔슈반가우성보다 높은 위치에 있기도 했고 마을과 제법 떨어져 있어서, 시간이 없는 우리에게 걸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아이들도 좋아할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선택지에 있었다. 성과 어우러지는 중세풍의 마차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호엔슈반가우성의 그것과 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을이 주는 포근함은 멀어진 거리로 느끼기 힘들었지만, 시원하게 펼쳐진 산맥과 호수의 조화는 창 옆에 그려진 그림을 무안하게 했다. 루트비히 2세는 대중과 떨어진 삶을 살며 아름다운 것만 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P가 이곳을 추천해 준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내 경험이 만들어지자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 아름다운 풍경의 손짓이 루트비히 2세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P에게는 누군가에게 추천할 장소로 기억에 남게 했으며, 우리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간을 초월해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장소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추억들을 만들고 간직한다. 백만 명이 다녀간 장소에는 백만 개의 추억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