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의 수분이 빠져버린 여름날, 관자놀이가 찌릿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마셔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팽팽히 조여있던 근육과 신경이 한 번에 풀려 버린다는 것을. 이런 경험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사람이라면, 독일에서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이 버킷리스트 상단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그런데아쉽게도 뮌헨의 첫날은 맥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냉장고에 든 캔맥주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캔맥주라니. 태국에서 망고 통조림을 먹는 격이었다. 그렇게 미뤄진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퓌센에서 기차를 타고 달려갔다. 창가로 들어오는 바삭바삭한 햇살이 유혹하는 물 한 모금도 외면한 채.
“그만 보자! 빨리 가서 자리 잡아야 해!”
유럽에서 거리공연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반복되는 풍경의 지루함이 조금씩 느껴질 때, 그늘진 벤치처럼 쉬어가기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첫 번째 연주가 끝나갈 즘, 갈증과 함께 짜증이 몰려왔다. 공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는지 아내는 반응하지 않았다. 두 번째 연주가 끝나갈 때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왔다.
“여기 연주 들으러 왔니? 얼른 가자!”
버럭버럭하는 성격이 나오고 말았다. 공연을 등지고 술집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따라오는 아내는 멀어져 가는 연주를 듣는 건지, 나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킷리스트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거리공연과 멀어질수록 무거워졌다. 조금만 참을걸.
안내받은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의 긴 테이블에는 이미 거나하게 마신 여행객이 앉아 있었다. 꽉 찬 테이블은 회식 자리를 연상시켰고, 나는 성난 부장님을 달래는 윤 대리가 되어 아내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여기가 합석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고 늦으면 자리가 없어 한참을 기다리거나,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결국 성낸 만큼 손해 보는 건 나였다. 항상 그랬다. 조금만 참을걸.
1L짜리 잔에 든 맥주가 줄어들수록, 흥청망청 들떠있는 비어홀의 분위기에 아내도 나도 휩쓸려 갔다. 결국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결론 없는, 그냥 그런 술자리 분위기로 그날이 정리됐다. 물론 지금까지도 독일 맥주가 생각날 때면, (내가 불리한 일에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아내는 내 머릿속을 그날의 거리공연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미안함과 억울함 그리고 함께 밀려오는 생각. 조금만 참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