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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Jun 02. 2024

산토리니 매직

“예약하신 렌터카가 스틱밖에 없습니다.”


‘아이고 요즘 스틱을 어디서 운전해봐. 1종 보통인데 오랜만에 연습하고 좋네. 히히.’


“소형차라 에어컨 기능은 없어요.”


‘연비 오지겠구먼. 차 창문 열고 다니면 지중해 바람 실컷 맞겠어. 헤헤.’


산토리니에 도착한 순간,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산토리니 팬심이 두터웠는지 몰랐다. 포카리스웨트 모델이 청순함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순백의 벽면과 포인트로 칠해진 짙은 바다색 돔들. 찌는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이 산뜻함이란. 광고를 본 순간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 꿈꿔온 ‘언젠가’가 바로 ‘오늘’이었다.


퇴사 후 가족과 함께하는 70일 동안의 여행에서 유럽과 미국을 훑고 하와이까지 간다는 건 모든 여행지에 아쉬움 한 바가지씩 흘리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차나 비행기로 한두 시간만 가면 볼 수 있는 죽기 전에 꼭 봐야 시리즈에 포함된 여행지를 눈 질끈 감고 패스한다면, 더 큰 아쉬움을 남길 것 같았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도 산토리니 일몰은 1박에 두 번 볼 수 있도록 계획했다. 평균적으로 7월에 하루만 비가 온다 했지만, 그날이 오늘일 수 있으니. 산토리니 일몰에 ‘진심’이었다.


일몰 시각은 8시 40분. 아직 여유가 있는 우리는 차 창문을 활짝 열고 지중해 바람을 맞으며 공항과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산토리니 서쪽에서 보이는 작은 섬이 화산섬이다. 그곳에서 분출된 용암은 서쪽을 높은 절벽으로 만들고 완만히 흘러내린 동쪽은 해변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공항은 동쪽에 있다. 카마리(Kamari) 해변의 모래는 잿빛이다. 내 취향은 아니다. 밀가루처럼 날리는 고운 은모래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도 산토리니 해변을 거닐었다는 인증샷은 남겨야 하니 아이들을 풀어놓았다. 수영복이라도 꺼낼 수 있었다면 일몰이고 뭐고 바다에 들어가 안 나올 아이들이었지만, 다행히 수영복은 캐리어 속 깊이 숨겨져 있었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물수제비. 바다 위를 통통통 튀게 던질 만큼의 기술은 없었지만, 모래만큼 많은 자갈을 쉼 없이 고르며 던지기를 반복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논 해변의 시간은 일몰을 코앞으로 당겨 놓았다. 숙소가 있는 피라(Fira)에서 체크인하고 일몰 성지인 이아(Oia)로 가는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사진으로 봐왔던 일몰은 굴라스(Goulas) 성채에서 찍어야 나오는 사진이었고 잠시 후면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성채 위로 몰려들 것이었다. 이아마을 주차장에 마지막 한자리가 없었다면 성채 위에 우리가 설 자리도 없을 수 있었다. 에게해 최대 매직쇼는 아직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하얀 건물에 하나둘 불이 켜지면 매직아워가 시작된다. 오렌지빛 전구의 반짝임과 살짝 보이는 에메랄드빛 수영장은 주연이라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진정한 주연임을 잊지 말라며 바다 빛과 하늘빛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충실하게 변했다. 이게 석양의 정석이라 말하는 것처럼. 산토리니는 하얀색과 바다색의 조합이 아니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색의 조합이었다. 커튼콜을 마치는 짙은 보랏빛에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었다.


피라마을 주차장에서 숙소까지 거리는 생각보다 험난했다. 좁은 골목길은 친절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바닥이었다. 굴러가는 캐리어 바퀴와 함께 ‘숙소 찾아 헤매는 여행자 여기 있소’하는 소리를 만들었다. 힘들게 찾은 숙소에서 만난 호스트는 겸연쩍게 반겼다. “너희가 하도 늦어서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래서 너희 숙소는 다른 손님에게 줬지. 걱정하지 마. 더 좋은 곳을 알아봐 줄게.” 산토리니는 아테네에 비해 물가가 비싸다. 섬이고 인기 여행지기에 당연하다. 그런 이유로 고급진 곳은 예약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시스템이 엉망이라고? 그 더 좋은 곳, 내방 준 사람한테 줬으면 됐잖아.’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여기저기 전화한 호스트는 캐리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도대체 얼마나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가는 거야. 그냥 예약한 숙소에 방 하나 만들어 달라고 때 써야 했던 것 아니었나. 숙소가 너무 안 좋으면 어떻게 하지.’ 청량감 넘치는 푸름과 하얌의 조화도, 환상적인 노을빛도 사라진 지금, 부정적 생각은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고 말았다.


오 분쯤 절벽 위 골목 사이로 헤집고 다녔을 때 호스트가 걸음을 멈췄다. 우리 의견은 필요 없다는 듯 새 호스트에게 우리를 떠넘기고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하룻밤인데 어디든 잠만 자면 되지.’ 문을 열고 들어온 숙소는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산토리니 숙소를 예약 사이트에서 정신없이 찾을 때 잠시 머물러 있다가 가격을 보고 이내 다른 숙소로 스트롤 했던, 신혼부부가 와도 손색없을 하얀 동굴 속 침실과 함께 에메랄드빛 수영장이 나를 놓치지 말라는 듯 빼꼼히 쳐다보고 있었다. 탐스럽게 열린 청포도 사이로 에게해 위에 떠 있는 화산섬도 보였다. 당장 안내한 호스트를 찾아 고맙다고 팁이라도 주고 싶었다. 이래서 호스트가 당당했구나. 기분 좋은 반전으로 팬심을 저버리지 않은 산토리니의 마술 같은 하루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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