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공항에서 잡아탄 택시부터 올림픽이 시작됐다. “Where are you from? Do you know Olympic?” 외국 연예인이 한국에 오면 김치를 아는지 물어보는 리포터가 있었다. 이곳은 김치 대신 올림픽을 물어보는 듯했다. 올림픽에 대해 설명하며 봉긋 솟아난 기사분 어깨 사이로 연회색 바위산이 보였다. 군데군데 올리브나무가 푸른빛을 지키지만 척박함이 느껴졌다.
숙소 앞 거리는 생각보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주는 분위기. 중동, 아프리카 난민은 유럽연합으로 가기 쉬운 나라로 그리스를 떠올리는 듯했다. 불법으로 넘어오는 난민을 막기 위해 터키와 그리스 국경에 펜스까지 설치됐다니. 까만 피부 속 크고 흰 눈동자를 지닌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 많았다. 그 눈동자는 우리를 뚫어지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들에 대한 편견이 얕은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첫 여행지인 데다 그리스 경제가 무너져 가던 현실이 편견 속으로 내몬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지켜야 하는 이들이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눈빛과 더위를 피해 호텔 루프탑 수영장으로 들어왔다. 시설은 여느 호텔 수영장 같았지만 배경은 놀라웠다. 아크로폴리스가 보였다. 차가운 수영장 속에서 시차와 더위로 멍해진 정신이 조금은 맑아졌다. '그래, 가족과 함께하는 세계여행의 시작을 수영장 물속에 녹여 버릴 수만은 없지. 여긴 신화의 도시, 아테네잖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아테네에 다가설 준비를 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호텔에서 빠른 걸음으로 십 분 거리다. 하지만 빠르게 걸을 수는 없었다. 그늘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골목길로 다녀야 했다. 어슬렁 거리는 무리를 지났지만, 초등학교 5학년인 딸과 2학년인 아들은 네 명이라는 숫자의 듬직함에 한몫했다. 골목을 지나며 스쳐 간 눈빛들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기운이면 어디든 고민 없이 갈 수 있겠는걸.
여행 전부터 고민은 일상이었다. 시작은 삼 년 치 급여로 흔들어 댄 회사의 구조조정이었다. 영국에 본사가 있는 회사는 감원을 발표했다. 유럽 재정위기가 이유였다. 그렇게 돈 줘서 내보낼 거면 지난해에 신입은 왜 뽑았는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왠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이 사십으로 들어선 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껏 쌓아온 항공 마일리지가 네 명이 세계를 한 바퀴 돌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은 머리를 쥐어짜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지배했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감각적으로 정했다. 대학교와 학과가 그랬고 결혼이 그랬다. 모두 후회는 없었으니 다시금 감각을 믿었다.
퇴사 선물은 여행이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세계여행을 꿈꾸며 통장 잔액이 '0'이 되어도 흐뭇한 마음으로 적립 카드를 열심히 긁어댔다. 미국과 북유럽은 가봤지만, 남들 다가는 서유럽은 처음이었다. 지도 위에서 지구를 스무 바퀴도 더 돌았다. 더운 여름 날씨와 런던올림픽을 감안한 일정이어야 했다. 먼저 서유럽을 여행하고 올림픽이 끝날 때쯤 런던에 들어가 미국 동부로 가는 일정으로 정했다. 마일리지를 사용하는 세계 일주 프로그램을 통해 항공권을 구매해야 했기에 비행거리가 짧은 것이 중요하다. 터키를 거쳐 그리스로 가는 것이 유럽으로 가는 가장 짧은 노선이었다. 그렇게 아테네에 오게 된 것이다.
언 듯 보면 덕수궁 미술관 같았다. 이오니아식 기둥 네 개가 정문이 아래 있다는 것을 묵직이 알려 줬다. 박물관 안은 아테네 자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연상되는 벽면과 이를 식혀주기 위해 연신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 지중해의 상큼함이 묻어있었다. 붉은 벽면을 배경으로 대리석 조각상들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조각상들이 이천 년 전에 만든 졌다고 느끼게 하는 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조각이 붙여진 흔적뿐이었다. 아름답고 세련됐다.
“오. 제우스다! 아닌가? 포세이돈인가?” 아내로부터 강제 주입된 그리스 로마신화가 결과로 나왔다. 그런데 딸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당당한 체격의 청동상은 모호한 설명이 되어 있다. 왼손바닥을 아래로 향해 앞으로 쭉 뻗은 상태에서 탄력 있게 뒤로 젖혀진 오른 팔꿈치는 지금이라도 들고 있는 무언가를 힘차게 내리꽂을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없다.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단다. 단지 제우스의 번개이거나 포세이돈의 삼지창이었을 거란 추측만 한단다. 신은 역시 모호한 존재인가 보다.
전시장 안쪽에는 가슴 한편을 가린 채, 관람객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서 있는 석상이 있다. 붉은 벽면과 어울리는 새하얀 아프로디테상이다. 이 모습을 짓궂은 아들이 흉내를 냈다. 지켜보던 경비원은 아들과 눈을 마주치며 오른손 검지를 꼿꼿하게 세워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동화가 아니라 신화다. 아직 이들을 신으로 인정하는 듯했다. 이내 공손한 자세로 바꿔 섰다.
‘어린 기수를 앉혀 놓은 이유는 뭘까?’ 힘차게 발돋움하는 말 위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타고 있었다. ‘그저 빨리 달리기 위해 체구 작은 사람을 앉혀 놓은 걸까? 이천 년 전에 설마 아동 착취?'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은 애늙은이처럼 보이게 했다. 비약적 상상을 알고 비웃는 듯 길어 보이는 중지. 흘러간 시간은 신화처럼 상상만 낳았다. 박물관을 나와 발길은 아크로 폴리스로 향했지만, 마음은 산토리니로 향했다. 내게 그리스는 산토리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