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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pr 19. 2024

속초여행

1월의 속초는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경윤이 눈을 뜨고 은원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없이 두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 은원의 현재 기분 따위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리란 행동이다. 그래서 그럴까? 지금은 아무런 열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서로의 손을 맞잡기만 해도 살과 살이 잠시 닿기만 해도 무수한 열꽃들이 한순간에 만개했었는데 오늘은 마치 습관처럼 행동하고 있다. 경윤은 지난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두 눈은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 응.... 몇 시야? “          

오전 9시, 희미하게 비치던 햇살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경윤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에 쳐진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니 속초의 파란 바다가 창문 너머로 넘실대며 흰 파도가 출렁거린다. 해수욕장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한산했다. 아름다운 나체의 여인이 바다를 배경 삼아 서 있는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이다. 은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미동도 없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단점까지도 다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은원은 조금은 더 냉정해져야 하고 차갑게 대해야 한다며 다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커피 마실래?”           

가만히 앉아 있던 은원이 일어나서 커피포트에 생수를 붓고는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경윤을 사랑하지만, 앞으로는 억지로 사랑을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은 그녀 탓으로 하기는 어렵다. 자신에게도 현재 3년간이나 사귀어온 약혼녀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경윤은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내가 은원 씨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마. 꼭 결혼이라는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지금 상태로 충분하니깐 이대로 이어지면 되지. 난 욕심 안 부릴 거야.”          

자신에게 집안끼리 정해 준 약혼녀가 있다고 어렵게 얘기했을 때 경윤은 사랑은 잠시 여행 온 거라며 정착지가 아니라고 했다. 처음부터 어딘가 잘못된 것은 맞지만 정확히 꼬집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혼동스러울 뿐이다.          

“응. 설탕 넣지 말고... 부탁해” 경윤은 자신의 손을 이마에 올리며 대답했다.          

둘은 어제 속초에 왔다.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같이 얘기를 나누다가 은원이 속초에서 사는 친구 얘기를 꺼냈을 때, 경윤이 먼저 말을 했고 은원이 맞장구를 치면서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 대산의 바다를 보고 살아가면서도 경윤은 속초의 바다를 한 번쯤은 동경했다. 사실 속초는 영진의 고향이었지만 벼르고 벼르다 결국은 끝내 같이 오지 못한 지역이기도 하다.          

“속초에 한번 가보고 싶다.”           

“그럼, 가면 되지. 시간 되고 돈 되는데 무슨 걱정?”          

다시 침대에 누웠던 경윤이 일어나 두 팔을 어깨 위로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랫도리가 뻐근하다. 어젯밤 거친 섹스의 뒤 끝이다. 섹스의 달콤함을 모를 리 없는 은원이 야릇한 몸의 대화보다는 유난히 박음질이 깊었고 거칠었다. “그래 한번 죽어봐라” 하는 차가운 표정으로 계곡 사이로 우람한 물건을 넣고 배려 없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경윤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고 확인하려는 질투 탓이다. 어젯밤 나이트에서 은원의 친구 현수와 경윤의 죽이 “척척박사”였던 것이다.      

그 여파로 은원의 심기는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경윤은 우선 당장은 “모닝 섹스”보다는 자신의 불편한 속을 따뜻하게 감싸줄 해장국 생각이 더 간절한 상황이다.          

전날 오후 3시쯤 속초에 도착한 둘은 호텔 로비에 앉아 은원의 친구 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 모두 호주로 떠난 은원과 달리, 현수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속초에서 사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살고 있다. 은원과 현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로 학창 시절의 사소한 추억까지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은원이 현수에 대해 말해준 것은 키가 1m 85에 체중이 110㎏의 거구인 그는 한 번도 진지하게 여자를 사귀거나 만남을 이어간 적 없이 그냥 즐기기 위한 정도에서 끝냈단다. 그래서 정신적인 문제까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육체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친구라고 했다.           

“그 얼굴.... 그 체격에 왜 여자가 안 붙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걔 정신적인 문제나 다른 곳에 문제 있어 그러는 거 아냐?”          

그가 없을 때 친구들끼리 현수에 대해 하는 말들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소파에 앉아 있는 둘을 보며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인다. 두 친구는 짧은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원래는 친구 한 명이 더 오기로 했다는데 갑자기 처가에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단다.     

현수는 바다를 끼고 먹고사는 수산업 관련 사업을 해서인지 검게 그을린 그의 피부가 경윤에게는 무척 색다르게 다가왔다. 현수는 진작부터 은원의 약혼녀 숙영을 만났던 적이 있었기에 경윤은 그저 은원이 가볍게 즐기는 정도의 상대인 줄로 생각하고 있다.          

“인사해 경윤 씨. 이쪽은 내 친구 김현수.”          

둘은 서로에게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경윤은 겉에 두꺼운 숏 패딩을 걸쳤지만, 안에 입은 건 몸에 쫙 달라붙는 운동복 같은 바지에 살짝 배꼽을 드러낸 탱크톱 데일리룩으로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뽐냈다. 현수의 눈빛이 반짝거리며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윤도 그의 까맣게 탄 얼굴에 대비된 하얀 이빨이 입술 사이에서 슬쩍 보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넌 결혼 안 해? 자리도 잡았잖아. 결혼해야지.”          

“결혼은 하긴 해야 하는데, 영 쉽지 않네. 일단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야 되는데,  난 좀 그렇다. 여자들에게 좀 많이 데었거든.”          

“하긴, 요새 그런 애들이 많긴 하지.”          

은원과 현수는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친구들의 얘기는 물론, 이런저런 자신들의 근황을 얘기하며 더러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하기도 해 경윤이 둘의 사이에 끼여 받아칠 수가 없었다. 문득, 은원과는 서로의 영역을 공유하고 이해하기엔 너무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따뜻한 인간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속초시의 어느 상인회에서 내건 현수막이 경윤의 눈에 띄었다.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즈음은 숙박과 교통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인센티브를 지역별로 제공하고 있다.     

겨울은 해가 짧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어둑해진 속초의 바다는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색들이 펼쳐져 매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경윤 씨! 대게나 해산물을 좋아하십니까?”          

현수의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백미러로 경윤을 보면서 물었다.          

“네. 엄청 좋아하죠..... 없어서 못 먹어요.”          

이번엔 경윤이 현수와 백미러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속초는 동해안 최북단 어항으로 월남한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리고 속초항·대포항 등의 천연항구를 낀 항구도시로 자신의 밥줄이 두 항구에 달려 있다며 배는 타지 않지만 이미 뱃사람이라 날씨에 민감하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일행이 가고 있는 곳은 대포항 근처의 횟집으로 바다에서 나는 모든 생물을 싱싱하게 먹을 수 있는 집이란다. 도로 위의 차들이 막혔다 풀렸다 하면서 식당에 도착했다. 현수는 예약한 자리에 앉기 전 수산물 코너를 돌며 대게를 비롯해 이것저것 골라가면서 다양한 종류의 많은 양을 주문했다.          

“여기 해산물 좋아요. 원 없이 드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라. 돈도 없을 텐데.....”          

은원이 대게의 집게발을 손에 들고 경윤에게 파주며 농담 삼아 말을 했다. 셋은 소맥을 말아 마셨다. 시곗바늘이 이때 정각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현수는 경윤에게 무척 관심이 가는지 많은 것을 궁금해했다. 경윤은 몇 잔의 소맥으로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안주가 좋다면서 연신 술을 마시며 현수와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었다. 현수는 은원과 달리 활발한 성격이라 모임을 할 땐 언제나 리더 하는 축에 속하는 타입인 듯했다.     

현수는 목이 탔는지 술을 마시면서도 콜라를 캔 뚜껑을 따서 마시면서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대부분 영양가 없는 가벼운 대화였다. 속초에 온 만큼 많이 웃고 많이 즐기라고 말하면서 경윤 씨가 우울하면 자신이 웃겨 주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다음에 혼자 여행을 오라면서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겠다고도 했다. 그 말은 진심일까? 아마도 반은 진심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그 순간 현수는 절절한 표정을 지으며 경윤의 얼굴을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씀,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오게 되면 필히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경윤이 길게 숨을 내뱉는다.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현수에게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다. 그러자 다시 현수가 입을 열었다.      

“정말이에요. 경윤 씨!”     

“안 오시면 제가 대산으로 내려갈 거예요. 저는 경윤 씨에게 솔직히 호감이 가거든요.”     

셋이 있었는데도 뒤에 주문한 술은 둘이 거의 다 마셨다. 술잔을 쥐고 현수가 경윤을 다시 쳐다보며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술자리는 한 시간 반째 계속되고 있다.     

“어쨌든 저는.....”     

경윤이 현수의 말을 끊기 위해 고개를 내 저으며 말을 했을 때, 현수가 눈까지 치켜뜨고 경윤을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되는 인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전부터 인연이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정말 경윤 씨 같은 사람이 필요하고 좋아합니다.”     

친구의 애인을 드러내놓고 마음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현수의 짓궂은 행동일 것이고 농담이라면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서먹한 자리에서는 그의 유쾌함과 호방한 성품이 좋을 수 있다고 경윤은 생각했다. 반복되는 현수의 자신의 대한 얘기에 화제를 돌리기 위해 경윤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은원을 향했지만, 회를 한 점 들어 입에 넣은 은원이 풀썩 웃으며 외면했다.     

어느덧 시간은 다시 한 시간이 지나 벌써 8시 30분이 넘어가고 있다. 은원은 이제쯤 자리를 파하고 해수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럼 다음 어디로 가지?”          

현수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하자 경윤이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신나는 곳에 갈까요? 은원 씨 나이트클럽이나 한번 가볼까?”          

“나이트클럽??”          

은원이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경윤에게 되물었다. 순간 절반이 보이는 그녀의 가슴골과 느슨해져 어깨에 걸린 검은색 브라 끈이 그의 눈에 거슬렸다.          

“그래 그거 좋겠네.... 우리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예 뿌리를 뽑아야지. 호텔로 다시 가죠. 거기 나이트가 속초에서는 최고로 알아주는 곳이거든요.”          

현수가 눈치 없이 한마디 거든다.     

경윤이 클럽을 좋아해도 은원과 둘이서 같이 간 적은 없었다. 특히 은원은 운동은 열심히 하고 좋아하지만 춤이라면 칠색 팔색하는 편이다.          

“좋아... 그럼 다시 호텔로 돌아가자.”     

클럽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현수와 경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뒤이어 은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신발을 찾아 신었다.          


셋이서 택시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돌아왔다. 이미 식당에서 3시간 가까이 술을 마셨으니 어지간히 마신 셈이다. 특히, 현수와 경윤은 훨씬 더 마셨다.      

현수가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며 자꾸 권했기 때문이다. 경윤은 이미 취해 약간은 풀어진 모습이다.     

일행들이 클럽으로 들어서자 웨이터가 달려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맞이했다. 이곳은 성인들을 위한 감성 술집이고 일명 헌팅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사장님 찾는 건 버릇이 되어서인지 웨이터는 현수를 보자마자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클럽 안은 경제가 불황이라 더 경기가 좋지 않다고 했지만, 오후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홀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셋은 룸에 들어가지 않고 무대가 있는 홀에 앉아 양주를 주문했다. 테이블 자리마다 캔들이 마련되어 옛날 나이트처럼 웨이터를 부르고 싶을 땐 캔들을 손으로 들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윤의 드레스 코드도 나이트클럽 코드와 우연히도 일치했다.          

“이런 분위기를 얼마 만에 느껴보는가.....”           

분위기에 감동을 먹은 경윤이 양주를 홀짝거리며 아직은 조금 한산한 무대 분위기에 아쉬움을 가져 보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 나와 춤을 추고 이내 무대를 가득 메웠다. 강렬한 비트가 흐르면서 음악이 나오자 시스루 입은 남녀댄스팀이 나와서 파워풀 군무도 보여주고 런웨이스러운 무대도 보였다. 자리에 앉아 몸을 흔들던 경윤도 빨리 무대로 나가 춤을 추고 싶은 마음뿐이다.      

경윤의 속 마음을 눈치챈 현수가 손을 내밀자 경윤은 아예 패딩을 벗어버리고 무대로 나갔다. 둘은 신나게 몸을 흔들며 즐겼다. 탱크톱과 경윤의 바지 사이에 드러난 매끈한 허리가 단연코 돋보인다. 은원은 그 모습이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고 못마땅하면서도 애매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음악의 리듬에 따라 맞추듯이 두 사람의 몸도 빠른 2박자의 폴카처럼 빨라진다. 또한, 경윤은 맘껏 자신의 관능미를 뿜어대며 무대를 휘어잡는다. 무대에 나가고 나서 5분도 되지 않아서 다른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무대 중앙을 차지하게 된 경윤이다. 현수는 마치 그런 경윤을 호위하듯 자꾸만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고 때로는 일부러 몸을 부비기도 했다. 은원은 조금은 보수적인 성격의 자신과 달리 원나잇에 익숙한 경윤이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때로는 연인의 마음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오늘도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격정적인 음악이 클럽의 열기를 지핀 뒤에 이윽고 잔잔한 블루스로 바뀌자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안고 더욱 몸을 가까이 붙였다. 클럽의 분위기에 취한 듯한 경윤이 가쁜 숨을 내쉬며 현수의 품에 안겼다가 목을 끌어안고 키스하는 모습이 어두운 무대 조명 아래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현수의 강한 몸짓에 경윤의 얼굴이 가슴에 묻혔다. 어떻게든 경윤을 유혹하려는 현수의 세심함에 은원의 불안함이 더해진다. 어쩌면 경윤의 하체 입구가 상당히 벌어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경윤이 배터리가 완충되듯이 활기가 넘친다면 은원은 채워진 에너지가 밖으로 모두 비워지는 느낌이다.          

“좋아?”          

테이블로 돌아와 옆에 앉은 경윤을 보며 조금은 화난 말투로 물었다. 지금까지 경윤을 만나 사랑하면서 짜증이나 싫은 소리를 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사람인지라 변하긴 하겠지만 이런 행동이 반복된다면 불쾌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탈탈 털리게 될 것이다. 이제 그만 숙소로 들어가고 싶은 은원이지만 그렇게 말을 했다가는 분위기만 어색하고 복잡해진다.        

“응 좋아. 아~~~ 정말~~~ 클럽에 오랜만에 왔다. 너무 좋아~~~”          

현수는 은원의 눈을 외면했고 경윤은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좋아했다. 그에 비해 은원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둘은 춤을 추며 놀다가도 서로를 탐하듯이 살결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경윤은 현수의 흥분된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뺨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현수의 아랫도리는 이미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연인을 앞에 두고도 자기 친구와 거리낌 없이 신체 접촉을 하는 모순된 성 의식을 가진 경윤의 모습은 실망을 넘어 은원에게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도 야사시한 눈웃음을 날리는 경윤의 이중성을 뭐라고 받아들이며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침없는 둘의 연애 놀이에 새삼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생각된 은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이상 끌고 갈 자신이 없었다.      

우린 어떤 관계이길래 이러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새벽 2시가 되어 헤어질 때까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왔다.          

“나가서 간단하게 해장이라도 하죠.”          

“오늘은 너무 많이 마셨으니. 다음에 보자. 덕분에 잘 놀았어....”          

클럽을 나왔을 때 몸속의 기운이 한 올도 남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가누질 못하는 경윤을 보며 현수가 해장국집에 가자며 꼬드기는 것을 은원이 중간에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도록 끊어 버렸다. 아마도 더 두고 있었다면 둘은 본능적인 쾌감에 빠져 밤새워 허덕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술에 취했어도 이미 몸이 달아오른 경윤은 방에 들어와 서둘러 은원의 입술부터 찾았다. 그리고는 은원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자신의 옷도 벗어던졌다. 한껏 들뜬 모습의 경윤에 비해 은원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어떻게든 은원을 유혹하고 넘어가게 만든 후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유로 정당하다고 경윤은 생각할 것이다. 그녀의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은 내키지 않았으나 몸은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클럽에서 현수와 둘이 춤추던 모습과 키스하던 모습,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을 다시 떠올리며 경윤의 몸을 침대로 힘껏 밀었다.     “이 순간만큼은 너를 전혀 배려하지 않으리라....”          

은원은 웃음기를 지우며 거칠게 다뤘다. 여태껏 참았던 감정이 솟구치는 은원이다. 경윤은 통증을 느끼면서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 너는 단지 나의 배설에 필요한 기구일 뿐이다.”           


새벽 6시.      

은원은 혼자 먼저 눈을 떴다. 베란다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닷바람이 휘몰려 들어와 커튼이 강하게 펄럭였다.      

속초의 새벽공기는 대산에서 느껴본 적이 없을 만큼 차가웠다. 다시 창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현수를 소개해 준 자신을 책망했다. 어제 클럽에서 나와 헤어질 때 현수는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경윤을 크게 안았다.          

“대산에 꼭 놀러 갈게요.”          

반면에 은원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눴다. 새벽바람에 흩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이제는 우정이란 단어도 속초 하늘의 허공으로 흩어질 것이다.      

경윤이 나 말고 또 다른 남자에게 너무 쉽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무거운 돌덩이처럼 깊은 상처로 박혔다. 아무리 처음 본 사이라 해도 연인의 친구로서 예의는 있어야 했다. 이런 일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길 일은 아닐 것이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깊은 잠을 자면서도 경윤이 몸을 뒤척이니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보인다.      

수많은 손의 흔적들이 훑었을 것이며 또한, 수많은 입술의 흔적이 묻어 있을 가슴이다. 은원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들과 잠을 잤을까?”          

샤워를 하고 화장까지 마친 경윤이 말없이 침대에 앉아 있는 은원의 손을 잡았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일어나 등 뒤에서 그를 안고 입술을 덮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은원이 혼자서 세 시간 동안이나 했었던 깊고도 불길한 고민은 경윤의 이 뜨거운 손과 행동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고 힘을 잃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남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매서운 한파가 계속되는 북쪽 지역으로의 겨울방문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이번 속초 여행으로 깨닫게 된 경윤이다. 추위를 더 고통스럽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 장갑과 모자까지 챙겼다. 다이어트를 위해 굶거나 저칼로리 식품을 많이 섭취해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추위에 약하다는 한의사의 경고 아닌 경고를 듣고는 정기적으로 보약까지 챙겨 먹고 있다.         

오후 3시,      

둘은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 중이다. 경윤은 영진의 고향인 속초 여행이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어제 도착 직후부터 짜증도 나고 왠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즉흥적인 기분에 휩쓸려 얼떨결에 온 여행이었지만 막상 속초에 직접 와서 보니 이상하리만큼 영진의 생각이 떨어지지 않는다.          

“잘 살아 정말. 그게 제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마지막으로 영진을 커피숍에서 만나고 헤어질 때 그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냥 잘 가란 소리네. 이제 속이 후련하니?”          

경윤은 애틋한 표정까지는 아니어도 못내 아쉬운 표정은 지을 줄 알았다. 영진과 만나기 위해 직장에 휴가까지 내어 아침부터 헤어숍 들러서 헤어 관리받고 마사지 샾에서 피부관리도 했다. 그리고 옷도 더 멋 부리며 입고 갔었는데 영진은 이혼에 따른 둘의 협의 사항만을 간단하게 언급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비참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4년이다. 더 찰떡같이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서로의 섹스 판타지가 비슷했으며 모든 게 잘 맞았다. 하다못해 음식 메뉴 선택도 같았고 커피 취향까지도.. 그리고 여행지 선택도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영진을 사랑했다. 아니 어쩌면 영진의 사랑이 절실했다. 영진과 결혼하기 전까지 공개적인 연애도 해봤고 몇 명의 남자들과는 섹스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숱한 남자들 중에서도 영진에게만 안겨 있고 싶었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의 가슴에 안기어 그의 체취를 한없이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기운을 새롭게 차릴 수 있었다. 반면에 다른 남자들과는 안고 있다가 헤어지면 이내 허전하기만 했다.

만약에 그날 영진이 어떤 조건이라도 내걸고 이혼을 취소하자고 했다면 무조건 경윤은 그가 원하는 대로 따랐을 것이다.

설혹, 그 행동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우리가 했던 모든 행위와 행동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힘이 저절로 빠졌다.          

“넌 미련 따위는 아예 없는 냉정한 인간이구나! 그래 잘살게. 인간아!”          

저만치 돌아서 걸어가는 영진의 뒷모습을 보며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현수 입에서 “대포항”이란 말이 내뱉어졌을 때 경윤은 갑자기 숨이 멎었다.     

“대포항 근처에 고향 집이 있어.” 하던 영진의 말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또한, 괜한 서러움에 일부러 술을 더 마셨고 클럽에서도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와 대산으로 이사 온 후 딱 두 번 고향 속초에 들렀다던 영진은 “이다음에 꼭 같이 가보고 싶어.”하며 철석같이 약속했었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나 지금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인 거야.”    

언젠가 영덕에서 둘이 맛있게 대게를 먹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영덕 특산물인 왕자두를 씹었을 때 새콤한 맛에 얼굴을 찡그리자 달콤한 젤리처럼 말랑한 촉감의 입술로 키스를 해주며 그가 한 말이다.     

영진은 그렇게 경윤의 가슴속 어느 한 곳에 대못처럼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대못을 뺀 자리만큼이나 휑하게 비어 가고 아픈 것이다. 물론, 그를 영원히 놓아버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바보같이.... 추운 지역에 태어났으면서도 추운 건 너무 싫어.” 하던 모지리 인간.       

은원과 경윤은 오전에 숙소를 나와 먼저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뒤이어 청호동 아바이 마을을 찾았다.      

설악산은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산의 하나다.      

가을날 단풍객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라서 늦가을에는 수 킬로미터에 걸쳐 줄을 서는 차들로 인해서 “단풍 구경 대신 차 구경만 하고 왔다.”는 말이 생겼다.      

해발 700M의 권금성 정상에 오르니 강풍이 무섭게 불어왔다. 그 옛날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립된 권금성이지만 오늘의 강풍은 막지 못한다. 경윤은 은원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짜릿함보다는 “생존본능”이 우선이다. 호텔에서 나올 때 치마를 입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두텁게 바지를 껴입고 나온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말로만 듣던 울산바위는 6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금강산에서 열리는 바위 경연대회에 가기 위해 울산에서부터 걸어오다가 오도 가도 못하는 바람에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는 전설처럼 지금 경윤은 “이미 끝난 관계를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끝내지 못하고 고민과 방황 속에 오도 가도 못하는...” 자신의 마음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바이 마을은 배를 타고 청초호를 건너야 했다. 순댓집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어 배에 내리자 순대 냄새가 가득했다. 6.25 전쟁 때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면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 임시적인 움막 형태의 집들로 처음 정착하면서 형성된 집단촌이다. 아버지의 함경도 사투리인 아바이를 사용하여 일명 “아바이 마을”이라고 부른다.     

은원과 경윤은 함흥냉면과 순대국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향했다. 속초에서 서울까지는 넉넉하게 잡아서 네 시간이 소요된다.          

“경윤 씨! 이번에 서울 가면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릴까?”          

“나랑 어떤 사이라고 말할 거야?”          

“친구라고 하지 뭐.”          

어제 대산에서 속초로 오는 동안 은원이 물었을 때 경윤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둘은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초창기에는 만날 때마다 서로를 탐하기에만 급급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을 쓰다듬던 손길이나 입김이 섹스를 하기 위한 의례적인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짓이 고맙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불안함과 쓸쓸함이 더해갔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더 이상의 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힘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윤은 그런 그의 태도가 섭섭하기보다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연”이라며 “언젠가 우리도 헤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지 않은가? 지금 그가 결혼한대도 웃으며 보낼 수 있다. 애초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약간은 서로 다른 감정으로 처음부터 경윤은 그에게 매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서울역에서 둘은 헤어졌다.      

경윤은 예라 일행과 합류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이틀 전에 서울로 올라온 미술관 직원들은 『선진지 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며 내일은 『간송 미술관』을 찾을 것이다.          

“간송 미술관에서 고전 읽기” 18세기 조선의 천재 화가 혜원 신윤복의 그림 감상이 목적이다. 남성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여자들은 단지 보조 역할의 삶을 강요당하던 그늘진 시대, 혜원은 과감하게도 여인들을 작품 속 주인공이자 중심에 배치했다.     

간송 미술관은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몇 점씩만 선보이고 있어 혜원의 그림이 전시된다고 하면 관람객들의 긴 줄이 생긴다.          

지금 대산 미술관은 『혜원 신윤복, 기획전시』를 목표로 간송 미술관과 협의 중에 있다. 이번에 일이 성사된다면 경윤이 그렇게도 좋아하며 사랑하는 “미인도”를 당분간은 대산에서도 매일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라를 비롯한 일행들은 저녁을 먹고 생맥주 한잔을 하자며 숙소 근처의 호프집으로 들어왔다. 여자들뿐인 일행들이 장난 삼아 하룻밤 애인을 만들자며 호시탐탐 남자들을 물색하는 중이지만, 아마도 밤을 새워 찾아봐도 성과는 없을 것이다.     

경윤은 추위에 몸이 떨려온다.      

예라가 자신이 입고 있던 모피 조끼까지 벗어 주었는데도 여전히 춥다.      

요즘은 걸핏하면 아프다. 아무래도 몸살 기운이 생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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