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건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 살아도 가정을 지키기 어려운 거야.
큰 것부터 맞추려고 하지 말고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
이제는 새신랑이 된 종호와 술잔을 나누며 경윤이 말했다. 종호는 결혼 후에 한결 깔끔해져 있었다. 반면에 12월의 세찬 바람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어도 날카로운 맹수처럼 달려들어 몸을 후벼 파고 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얼굴 한 번 더 보자며 오래전부터 단골집인 양꼬치 집에서 둘이 만났다.
“난 그러지 못해 실패했잖아. 너라도 잘 살아야지.”
“실패는 무슨.... 인연이 거기까지였지.”
결혼한 지 석 달 된 새신랑 종호는 신혼집을 경윤이 사는 동네에다 구했다. 종호가 태어난 동네이기도 하고 와이프 윤주의 집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 또한 주거시설과 복합문화공간이 결합 된 주거문화 복합단지이자 대산의 대표 명소인 수안리 바다의 조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둘은 여전히 절친한 친구 사이로 잘 만나고 있다. 물론,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가끔 안부를 묻고 오늘처럼 한잔하고 헤어졌다.
종호는 예전에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던 윤주와 결혼했다. 여유 있는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게 전부였기에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삼아 윤주를 만나 몇 번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같이 자기도 했었다. 윤주의 나이는 종호보다 여섯 살 어렸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매도 얼굴도 나름대로 봐줄 만했기에 별생각 없이 만났다.”라고 했던 그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민과 사랑이 생겨버린 것이다.
결혼 전에 종호가 처음으로 윤주를 경윤과의 술자리에 데려왔을 때 나름 얼굴도 귀염 상이고 말투도 조신해 “참 잘됐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물론, 이때만 해도 종호는 “아직 결혼은....”이라며 반신반의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윤주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행동거지도 조신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생전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을 찾았다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연히 종호 일행을 만나 같이 춤을 추며 놀았단다. 그러다가 친구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대신에 파트너인 그의 손에 이끌려 모텔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윤주는 “자신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만남을 거듭할수록 종호에 대해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날 윤주는 경윤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을 했었다.
“제가 오빠한테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렸어요.”
경윤의 절친 종호는 속은 깊은데 밖으로는 표현을 못하는 게 흠이다. 오랫동안 서로 지켜봐 온 사이로 무뚝뚝하고 아쉬운 소리 못하는 종호를 누구보다도 경윤은 많이 타박했다. 그렇지만 친구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조차 내색하지 않고 기꺼이 행동하는 종호의 착한 마음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묵직한 사람이라는 것도 경윤은 알고 있다. 물론, 종호의 내면을 모르는 친구들은 “날 때부터 글러 먹었다.”며 자기들끼리는 “싸가지”라고 부른다는 것을 경윤도 종호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가끔은 싸가지가 정말 없긴 했지만.
반면에 윤주는 말도 이쁘게 했으며 불만이 있어도 바로바로 티를 내는 성격도 아니었다. 잔뜩 기대하고 나갔던 자신의 생일날에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종호를 “생일날 사랑하는 오빠가 내 옆에 있어 준 것만 해도 고맙고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경윤을 처음 만난 그날에도 윤주는 붙임성 있게 ”언니, 언니“하며 경윤을 따랐다. 그 뒤로 경윤은 종호에게
“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참하더라 윤주 씨는....” 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녀가 덜컥 임신한 것이다. 그 사실은 윤주의 고백으로 경윤이 먼저 알게 되었다. 그 후로 경윤은 종호에게 윤주와의 결혼을 더욱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래.... 그래.... 알겠다. 할게.”
물론, 종호도 윤주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겠다는 승낙을 받고 경윤은 자신의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했다. 종호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윤주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달가운 일이 아닌 것은 맞지만, 둘의 삶 속에는 서로가 그만큼 깊숙이 들어왔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정말!.... 내 친구.... 잘 생각했어... 고마워...”
경윤이 종호와 윤주를 처음으로 같이 만난 지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저, 안녕하세요? 저는 강윤주라고 하는데요. 일전에 종호 오빠랑 같이 뵈었는데요.”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경윤은 당연히 윤주를 알고 있었다.
“저,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그래. 내가 고맙지. 나도 동생이 없어서 좀 허전했는데 잘되었네.”
경윤은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윤주는 경윤의 대답에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는지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말을 했다.
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마치 어린 아기한테서 느꼈던 향기가 확 끼쳐왔다.
“좋아. 윤주야. 언제 볼까?
내일 만나 점심같이 할까?”
“네. 고마워요. 저희 집도 미술관 근처라서 점심시간에 찾아뵐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내일 봐.”
“그....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언니!”
경윤은 무슨 일일까? 생각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벌써 동생처럼 친근하게 여겨졌다.
다음 날 만난 둘은 점심을 먹고 미술관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그런데 경윤의 눈에는 처음부터 윤주의 표정이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무슨 일 있구나. 걱정하지 말고 언니한테 얘기해 봐.”
경윤이 윤주의 마음을 헤아려 부드러우면서도 나지막하게 말을 했다.
순간,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서인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경윤이 자리를 옮겨가 윤주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러자 겨우 울음을 멈추고,
“제가 임신을 했어요. 종호 오빠한테 말을 하려니 화를 낼까 싶어 불안하고 너무 걱정돼요.”
이미 두 달이나 달거리를 건너뛴 걸 알고 산부인과에 갔더니 임신이라 했단다. 그동안 속이 더부룩한 것을 몇 번 느꼈지만 설마 하며 있었는데 막상 임신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무섭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종호가 마음의 상처를 입어 자신을 떠날까 봐 그게 두렵다며 말했다.
“뭘 고민해 윤주야! 임신이 무슨 죄가 되나. 자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일이야.”
“아무 고민 하지 마. 내가 그의 오랜 친구야. 누구보다도 종호를 잘 알아. 엄청 좋아할 거야.”
이 상황에서도 자신이 “전도가 유망한 오빠를 망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든다고 말하는 착한 윤주를 만난 종호가 “무슨 복이 그리도 많은 놈인가!” 싶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경윤이다.
“직접 윤주가 종호에게 말해. 나도 도와줄게. 같이 만날까?”
“언니, 고마워요. 저는 오빠가 싫다고 해도 아이는 꼭 낳을 거예요.”
이제는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는 경윤의 손을 잡았다. 아마도 이 순간만이라도 윤주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용기가 치솟을 것이다.
“우리 윤주. 기특하네. 정말 잘 생각했어.”
그날 저녁 둘이 같이 종호를 만났다. 생각지도 않게 둘이 같이 나온 것을 보고 놀라 눈이 둥그레진 종호에게 윤주는,
“잘 들어, 종호 씨.. 나 임신했어, 오빠 애기야.. ”
멍하니 윤주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서 기쁨을 읽어냈다. 경윤도 이제야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둘은 결혼을 했다. 물론, 종호의 부모님도 윤주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우리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며 그날 저녁에는 자신들의 식당 손님들에게 공짜로 푸짐하고 정성 가득한 한 끼 식사를 차려주었다.
결혼 후 종호는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의 냉면 가게에서 아버지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차곡차곡 일을 배우며 익히는데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는 놈팽이고 유흥이나 즐기는 그저 그런 놈”이라며 마땅치않게 생각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그의 성실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랑이란 것이 무엇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조차 포기하면서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것은 아닐까?
경윤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정의를 또 하나 얻었다.
종호와 윤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정말 예쁘게 살아가고 있다. 경윤은 둘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영진과의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부부로 살 맞대고 4년을 살았다. 한 때라도 있었던 삶의 작은 추억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기만 했었던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새삼 영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그를 만나면 진심 어린 사과부터 해야겠다며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즈음은 영진이 보고 싶을 때도 많아졌다.
술집을 나오니 내리던 진눈깨비가 그친 후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외투 깃을 올리고 귀를 감싸며 바쁘게 걷고 있다. 차가운 바람은 아스팔트 바닥에 붙은 몇 안되는 낙엽조차 빠르게 쓸며 지나간다.
종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경윤은 일부러 영진과 손잡고 같이 걸었던 호젓한 오솔길을 택했다. 언제 어디서든 달려올 은원이 있었지만 한 번씩은 숙제를 하듯 내 손을 잡고있는 건 아닌가 싶은 허전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경윤은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기침을 터뜨렸다.
온몸을 에워싸든 추위 때문일 것이다. 집이라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오늘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