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조실장인 최종윤이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다. 아니 지금의 직위는 회사 부사장이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승진해 이제는 실질적으로 회사 전체를 총괄하고 있다.
인사동 한정집 “부용당”은 연잎밥과 보리굴비로 널리 알려져 항상 손님들로 북적대는 곳이다. 예약 자체가 힘든 곳이지만, 연아는 이번에 부사장 비서실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은 제가 모실게요.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부사장님도 보답을 받으셔야죠.”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회사에 돈 많이 벌어주면 그게 좋은 거야.”
최 부사장은 별도의 광고 대행사를 꾸밀 수 있도록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새로 지어주었고 또한 모든 행정적·재정적 어려움을 깔끔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물론, 그 덕분에 한때는 부사장의 세컨드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수공방 기다리고 사는 것이라며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지키고 존중해야 할 법이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둘은 규범에 둘러싸인 회사생활을 하면서 룰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아의 광고 회사는 본사와 멀지 않은 청담동에 소재해 있어 접근성과 편의성이 훌륭할 뿐 아니라 광고 제작사들이 밀집해 있어 창의적인 마케팅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한, 사무실은 시각적으로 시원하고 쾌적하며 공간의 개방감이 좋아 업무 하기도 편하고 광고주 유치에도 유리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건물의 설계단계에서부터 연아는 회사의 배려로 깊이 관여했었다.
물론, 인테리어도 연아가 직접 모던한 콘셉트로 라인 조명과 레일 등으로 포인트를 줘 감각적으로 꾸몄다. 지난 한 달 동안 연아는 회사 직원들과 같이 입주하기 전에 세세한 곳까지 다시 손질하고 정리하면서도 내내 들뜬 마음으로 지냈다.
“이 정도면 상당히 훌륭한 것 같은데요?”
“더 필요한 것 없어? 뭐든지 말만 해.. 몽땅 사주고 갈 테니까. 후후..”
사무실 개소식 자리에서 만난 최 실장은 웃음 띤 얼굴로 건물을 보고 품평을 하며 연아에게 말했다. 연아는 부사장의 마음 씀씀이 전해져 흐뭇하다. 또한 회사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구름 위에 둥실 떠가는 듯 마음이 들어 행복하고 설레기도 했다. 반면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이제 매일매일이 오늘처럼 정신없이 흘러갈 것이다.
“예, 부사장님! 충분합니다.”
“연아 씨를 시끄럽고 혼잡한 사회라는 전쟁터에 내보내게 되는 마음이란 말씀이야!
아무튼 연아 씨 맘대로 한번 꾸려봐요.”
“네. 알겠습니다. 어쩌면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 같습니다.”
“좋아요. 앞으로 우리 한번 잘해봅시다.”
당시의 일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연아는 마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다는 기분으로 미친 듯이 일을 했다. 회사 직원들은 처음에는 연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단지 최종윤과의 사적인 관계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연아는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차츰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어내었다.
물론, 현재 회사에서 광고 대행사의 위치는 집을 지을 때의 대들보는 못 되지만 서까래 정도는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종업원 둘이서 다 차려진 상을 맞잡아 들고 들어섰다. 연아는 술병을 들고 부사장에게 술을 따랐다.
“한잔 받으세요.”
사랑은 억지로 되지 않는다. 오늘 연아는 보라색 투피스 차림의 세련된 맵씨를 뽐냈다. 그리고 부사장이 자신의 몸을 원한다면 기꺼이 옷을 벗을 마음으로 만났다.
물론,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불륜을 저지르자는 것도 아니고 부사장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그동안 자신을 유별나게 잘 챙겨준 사람이기에 그가 원한다면 망설임 없이 품에 안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섹스를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서로 상대에게 집착할 이유도 없기에 지금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으면 된다.
연아는 그동안 PT를 통해 수많은 광고주를 설득하며 다녔다. 신생 업체의 대부분은 영업을 통해 광고주를 영입하고 경쟁 PT의 기회를 받을 수 있다. 연아는 기획하는 능력과 일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정리하는 능력, 그리고 데이터를 가시성이 좋게 분석하는 능력이 남달리 탁월했다.
특히 그녀는 광고주와 원활한 소통으로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녀의 정직과 성실함이 이쪽 계통에서 환영받았기 때문으로 지금은 광고주 측에서 연아를 찾고 있을 정도다. 물론 수주량에 비례해 연아의 업무량이 많아지고 야근의 빈도수가 올라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연아 씨!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아뇨. 괜찮아요. 많이 지원해 주신 거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난 누군가와 한 약속은 꼭 지킵니다. 제가 처음에 연아 씨한테 말했잖아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요.”
“네. 부사장님! 덕분에 우리 직원들의 사기가 높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잔도 한잔 받으세요.”
이번에는 부사장이 술병을 들고 연아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잔을 쥔 연아는 웃음 띤 얼굴로 부사장을 보았다.
“우리 광고 대행사를 국내 최고, 세계 최고로 키우고 싶습니다.”
“당연하죠. 연아 씨의 그 꿈을 적극 지원 하겠습니다.”
둘은 술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술을 한 모금 삼킨 연아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부사장 최종윤의 꾸밈없는 자세와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업무에 파묻힌 연아는 자신의 사적 활동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둘은 다시 채워진 잔을 들어 한꺼번에 다 마셨다.
윈윈(win win)이 단순히 서로 이득을 얻는 것만은 아니라고 연아는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들 알고 있지만 양쪽 다 한꺼번에 이득을 얻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에서 먼저 양보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상대방이 먼저 이득을 얻으면 나중에 자신이 이득을 얻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윈윈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필요하면 직원을 얼마든 더 채용하도록 해요.
온라인 마케팅에 국한하지 말고 새로운 변화와 시도를 통해 MZ 세대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을 타깃으로 광고 사업을 확장할 필요가 있어요.”
“네. 맞습니다. 저도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 챌린지 마케팅 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고객에게 친근히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의 전문가를 두 명 정도 더 채용하면 좋겠습니다.”
“연아 씨가 알아서 채용하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모두 부사장님 덕분입니다.”
“자꾸 내 덕분이라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우린 동업자고 친구 사이잖아요.”
처음에 연아는 부사장이 그저 자신의 몸을 탐내려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었다. 그러나 만나면 만나볼수록 자신과 광고 대행사를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는 마음 씀이 진실이란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의 성과가 달성되고 있어 요즘엔 오히려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부사장이 말한 “친구 사이”는 참으로 적절한 말이다.
우리가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니고 즐기는 사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그런 사이는 더욱 아니다.
부사장은 자신이 몸담은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이 삶의 희망이자 목적이며 연아는 광고 대행사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사회 친구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연아는 생각했다. 오늘 이 자리는 어찌 되었든 둘의 친구 관계를 확인하는 소득은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연아와 종윤은 식당을 나왔다.
밖에 나오니 시간이 많이 흘러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밤공기가 시원하여 술기운도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그녀는 크게 숨을 쉬며 시원한 밤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둘은 음식점을 나와 근처에 있는 노래주점에 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부사장 입에서 “노래 한 곡 하러 갑시다.”는 말이 나왔을 때 연아는 정말 깜짝 놀랐었다. 생각지도 못했을뿐더러 평소 부사장의 성품으로는 유흥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깜짝 놀라요?”
부사장은 웃으며 연아에게 되물었다. 연아는 부사장의 그 말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제 정말 호흡이 잘 맞는 오래 사귄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모처럼 만에 일에서 해방된 평화로운 밤시간이다.
“내가 이렇게 보여도 노래라면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사장은 노래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랑했던 것을 연아에게 실제로 증명해 보였다. 연아보다 더 최신곡을 잘 알았고 또 많이 불렀다. 심지어 흥겨운 노래는 그 가수의 춤까지 같이 추면서 불렀었다.
“오늘은 마음 맞는 친구끼리 노래방에 왔으니 한번 놀아보십시다.”
부사장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하루하루 쉼 없이 달려오면서도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서 익어가는 것이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는 연아에게도 한 곡조 하라며 권했다.
30대가 갖춰야 할 다섯 가지 중에 하나는 “멀어져 가는 사람의 마음도 잡을 수 있는 애창곡 한 곡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말이 있다.
연아는 『푸른 하늘』의 노래 『겨울바다』를 불렀다. 이 노래는 그룹멤버 유영석이 작사·작곡한 노래로 교회에서 만난 여학생을 짝사랑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슬픔을 담고 있다. 연아는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우정이 지속되기를 마음속으로 소망하며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연아의 눈 밑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겨울 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
스치는 바람 불면 너의 슬픔 같이하자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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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마친 연아는 종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개인의 사사로운 정보다는 회사와 조직의 일을 우선시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오늘 자신 앞에서 기꺼이 친구라며 일부러 흐트러지는 모습까지 보인 것이다. 연아는 진정한 친구로서 이제 답을 해야 했다.
연아는 부사장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감고 안겼다. 잠시 망설이든 그가 포근히 안아주었다. 연아는 고개를 들어 종윤의 입술을 찾는다. 그리고 종윤도 연아의 얼굴을 감싸며 그녀의 뜨거운 입술에 키스를 했다가 잠시 후 입술을 떼었다.
“이제 됐어. 연아 씨~~~~ 고마워”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
부사장이 맥주잔을 들고 웃는다. 연아도 잔을 들고 마주 웃었다.
둘은 그렇게 친구 사이가 되어 어깨동무까지 하며 밤이 늦도록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