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주, 일어났어?”
“엄마.”
눈을 비비며 나온 승은이 팔을 벌린 은선에게 뒤뚱거리며 다가와 안긴다. 은선은 빨래를 널고 나서 승은을 안고 잠시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는 세월을 멈추고 커피를 마시며 세돌이 갓 지난 승은의 재롱을 보며 같이 있는 오전 시간이 이렇게 행복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다.
이제 곧 친정엄마가 승은이를 데리러 올 것이고 자신은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두 달 전부터 아파트 인근의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교사로 아이들의 미술 수업을 하고 있다.
은선은 승민과 끝내 이혼했다. 대학 CC커플로 동갑내기 남편 승민과 결혼해 오색 빛 무지개 꿈을 꾸며 한동안은 환상 속에 살았었다. 그리고 승민이 유명한 증권회사에 취직했을 때만 해도 온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다. 그러다가 승민이 직장을 잃고 술독에 빠져 살 때부터 가슴은 자꾸만 황폐해지고 하루하루 지쳐갔다.
승민은 스스로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를 찾아 들어갔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술을 찾다가 본인도 힘이 들었는지 은선에게도 말하지 않고 짐을 챙겨 입원한 것이다. 물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생겼다는 것을 본인이 깨우친 것이다. 승민은 알코올 기운을 빌려서라도 현실 속의 자기 존재를 잊고 싶었다. 마치 길고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 악몽이 빨리 끝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원 후,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은선과 만나기를 원했다. 망설이던 은선에게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할 테니 무조건 빨리 오라고만 했다.
당시 은선은 대산 미술관을 그만두고 실업자 신세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제 승민에게는 더 이상의 기대도 없었다.
“무슨 일이야?”
“승은이는 잘 있지? 데리고 오지 그랬어.”
“당신이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해.”
“미안해. 은선아!”
“이제 그동안의 억지 연극을 마칠 때가 된 거야.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지난 세월은 생각하기도 싫어. 지긋지긋해.”
승민은 말없이 아내 은선의 얼굴을 보았다. 말수가 적고 수동적인 성격의 은선은 언제나 자신의 그늘에 가려 살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회사에서조차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잊히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동안 은선은 몇 번이나 이혼을 요구했으나 승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절대로 은선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 같은 여자를 놓치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승민이 차마 실행해 옮기지 못했던 이혼을 결심하고 은선에게 연락했다. 물론, 전화로 얘기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 은선아. 이제 때가 온 거야. 미안해. 이혼해 줄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
승민은 자신의 도장이 찍힌 이혼 신고서를 내밀었다. 자신만을 믿고 살아온 은선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밝은 빛이 보이 지를 않았다.
“우리 집도 당신 명의로 해. 그리고 승은이 잘 키워줘.
당신은 내게 너무나 과분한 여자야. 고맙고 미안해. 은선아!”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간절히 원했던 사랑을 얻었고 그 사람의 품 안에 갇혀 있다가 막상 떠나려 하니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온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 이제 더 이상 떨어질 곳조차 없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 깊은 상처만 입고 그렇게 은선의 꿈도 멀어져 가 버렸다. 치료센터를 나서니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무자비하게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아프도록 퍼부어 대었다.
“그래. 승민 씨 우리 두 사람의 매듭은 이제 완전히 끊어진 거야.”
부부란 내면으로야 어찌 되었든 표면적으로는 완전무결한 남편이 되어야 하고 아내가 되어야 한다. 승민에 대한 믿음이 깨어진 것이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집에 들어온 은선은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승은이에게 줄 간식을 만들었다.
은선의 휴대폰이 울린다. 경윤이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에게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아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짐승처럼 울부짖던 날, 뜻밖에 집으로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날은 미술관의 휴일인 월요일이었다. 경윤을 본 은선은 순간적으로 숨이 멎어 그 자리에 딱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경윤은 당황해하는 은선에 비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듯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다며 갖고 온 과일 바구니만 놓아두고 선걸음에 되돌아갔다.
“선배님, 언제든 전화 주세요.”라고 적힌 메모지와 함께......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은선을 찾아와 차도 마시고 때로는 밥도 같이 먹고 미술관 얘기를 비롯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승은이와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꼭 생활비 봉투를 슬며시 놓고 갔다. 당시 은선은 퇴직금으로 전셋집을 얻어 수중에 돈이 얼마 남지도 않아 살아갈 방도가 막막하기만 했던 형편이라 염치없이 받아 썼다. 언젠가는 꼭 그 고마움을 갚을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눈물로 한탄했다.
“선배님 저 경윤입니다.....”
“어. 경윤 씨 잘 지내고 있지?”
“그럼요. 선배님! 저야 잘 지내고 있죠. 선배님은 좀 어떠세요?”
“어. 나도 잘 지내지. 근데 무슨 일 있어?”
“일은 없고요. 선배님 얼굴 보고 싶어 그러죠.
혹시 내일 저녁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어요?”
“어. 그럼 집으로 올래?”
“아뇨. 내일은 밖에서 보고 싶어요. 예라 언니랑 직원들도 선배님 보고 싶다고....”
“그래. 그럼 엄마한테 승은이 좀 맡아달라고 부탁해 볼게.”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내일 뵙겠습니다.”
경윤은 얼굴도 너무 예뻤지만, 성격은 더 좋았다. 누구에게나 싹싹했고 붙임성이 있어 미술관에서는 다들 좋아했다. 처음 경윤이 대산연구원에 근무하는 남편과 이혼한다고 소문이 났을 때 “저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왜 이혼하는지?” 직원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납득하지 못했을 정도였었다.
다음날, 예라를 비롯한 대산미술관에서 같이 근무했던 일행들과 은선은 새로 오픈한 한우 전문점에서 만났다. 은선이 조금은 무안해하며 식당으로 들어서자 모두 일제히 일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일이 직원들의 손을 잡았고 그중에 예라와 경윤과는 포옹으로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겠어요. 언니?”
“그래 더 좋아졌네. 누가 보면 처녀라고 하겠다. 잘 왔어.”
예라의 말에 은선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경황없는 중에 달랑 팩스 한 장으로 사직서를 내고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부랴부랴 도망치듯 퇴직했으니 서운함도 있었을 것이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이렇게 마음과 뜻을 모아 퇴직 축하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푸짐하고 고급스럽게 식사도 하고 축하 꽃다발도 받았다. 오랜만에 은선은 행복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은선은 예라와 경윤을 보며 “아름답다.” “눈부시다.”는 이 말 이외의 세상의 모든 좋은 표현을 다 갖다 붙여도 마땅히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반면에 자신은 어느 산 깊은 골짜기 바위틈에서 조용히 피어나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들꽃처럼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인 것만 같았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일행들이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다소곳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예라가 술잔을 은선에게 권하면서 말을 했다.
“미술관에서 임기제 직원을 한 명 뽑는데 할 수 있겠어?”
앉은 채로 있던 은선이 웃음 띤 얼굴로 예라를 보았다. 예라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은선의 가슴에서 갑자기 뭉툭한 울렁거림이 목까지 가득 차 올라왔다.
예라 옆에 앉았던 경윤이 역시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언니, 다시 같이 근무하고 싶어요. 승낙을 해주세요.....”
경윤의 말이 끝나자, 다른 일행들도 모두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영했다. 모르긴 몰라도 예라와 경윤의 힘이 컸을 것이다.
은선은 이제 시선을 내리고는 곧 울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너무 감동해서 울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언니. 정말 고맙습니다......”
셋은 지금 은선의 집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젊은 직원들이 2차로 호프집에 가자며 따라붙은 것을 “꼰대”소리 듣기 싫다며 핑계를 대어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다.
“연구관님 한 잔만 더해요. 우리!”
“선배님 조금만 더 놀아요!”
후배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셋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미안해 언니. 그리고 고맙고..... 경윤이도 그렇고.....”
“괜찮아. 이렇게 직접 너를 보니깐 안심이 된다.”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자마자 은선이 호흡을 가다듬듯이 숨을 내쉬고 예라와 경윤을 보며 말을 했고 예라가 얼른 대답했다.
16평 소형 아파트 거실에는 2인용 소파와 낡은 텔레비전이 한 대 있었으며 승은이를 태우고 다니는 유모차가 있었다. 경윤은 이 삭막한 공간에 생기를 줄 수 있는 화분을 하나 사야겠다며 마음을 먹었다.
승은이가 화분에 찔려 다칠 수 있으니 뾰족하게 생긴 스투끼 종류보다는 아름다운 잎의 패턴과 색상으로 둥글둥글한 《스탄디아 모스》가 더 좋을 것 같다. 물론, 은선이 대산미술관에서 근무할 때 자신의 책상 위에 유일하게 놓아두었던 《핑크 아악무》도 하나 사야 할 것이다.
셋이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따뜻하고 잔잔한 느낌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승민 씨는 어때? 소식은 들어?”
“이제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던데 하루에 6~8병을 마실 정도로 심각했는데 쉽게 금단 증상이 사라지겠어요.”
“완전히 갈라 선 거야?”
“무슨 정이 있고 사랑이 남았겠어요.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
승은이만 보고 살 거예요.”
예라가 다시 물었을 때 은선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대답하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인생살이가 다 싸우면서 산다지만 한때는 유일한 낙이자 삶의 원동력이었을 승민이와는 최근 몇 년을 죽지 못해 살았었다. 말을 하면서 도 은선의 눈가에는 다시 이슬이 맺혔다.
“이혼녀 셋이 모였는데 뭐가 두렵고 겁이 나는 게 있겠어.
우리도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파이팅 하자. 우리!”
예라가 위로하듯이 커피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거칠고 성난 파도에 일렁이던 대산의 바다가 한순간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