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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pr 19. 2024

우연한 만남

진연아. 그녀의 이름이다. 서울 출장 가는 길에 정차역을 알리는 성우의 멘트와 함께 KTX가 동대구역에 멈췄을 때 여름날의 뜨뜻미지근한 바깥공기와 함께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잠깐, 실례할게요.”     

맑은 여자의 목소리에 영진은 머리를 들었다. 순간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2초쯤 되었을 것이다. 긴 생머리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그리고 눈빛처럼 새하얀 피부, 무엇보다 작고 도톰한 입술이 마음에 들었다. 한눈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도가 높은 얼굴이다.     

“좀 앉을게요.”          

부드러운 서울 말씨다. 나이는 기껏해야 20대 후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영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창 측 좌석의 주인은 티겟을 발권한 그녀였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재스민 향수 냄새가 기분을 좋게 했다. 전체적으로 상쾌하고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느낌이 있었다.      

여자는 파란색 민소매 카라 셔츠에 흰색의 짧은 치마를 입어 스타일리시한 매력을 드러냈으며 미끈한 각선미가 돋보였다. 신발은 스타일과 편안함을 동시에 즐기는 슬랙스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키가 어림잡아 1m 70은 될 것 같다. 곁눈질로 흘낏 본 가슴의 볼륨도 제법 컸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금방 만난 여자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나 의미를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때 KTX가 출발했다. 다시 객실 안은 조용해졌다.          

기차는 쉼 없이 달린다. 영진은 차창 밖을 보았다. 산도들도 알록달록 아름답게 채워져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기찻길 숲 속 맨발 걷기 산책로 조성 사업”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철로 변을 따라 길게 조성된 산책로 숲길은 누구나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명품이라는 이름을 붙여 숲길을 조성하고 있다. 그냥 즐기도록만 하면 될 것을 하물며 나라에서 “좋은 숲길 경진대회”까지 열어 순 위를 매긴다니 발칙하다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일이다.     

“어디까지 가세요.” 그 여자의 첫 번째 멘트다.     

대놓고 묻는데 모른 척 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일 필요는 더욱 없을 것이다.     

“서울 갑니다.”     

영진이 머리를 돌려 여자를 보며 짧게 말했다. 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집이 서울이세요?”     

여자가 자세를 고치면서 다시 물었다. 셔츠 단추를 3개쯤 풀어헤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가슴이 몸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인다. 영진은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민망함을 숨기듯 얼른 대답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뇨. 집도 절도 대산~~. 서울 출장 가는 길 입니다만, 그쪽은요?”     

그렇게 묻고는 여자를 향해 싱긋 웃었다.     

“저는 출장 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에요.”     

여자도 웃음 띤 얼굴로 영진을 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웃음이 보이는 순간 구름 사이로 가려진 보름달이 이제야 환히 떠오르듯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전 김영진이라고 합니다. 허울 좋아 연구원이죠.”     

영진이 제 소개를 하며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나라에 전쟁이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무더기로 쓸려나가고 마는 불쌍한 존재라고    할 수 있죠.”     

자신도 모르게 군더더기의 말을 덧붙였는데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했다는 민망함에 스스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진연아라고 합니다.”      

여자는 손에 잡고 있던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내밀었다.     

“상상을 주입하다(광고 대행사)”     

 디자인 실장 진 연 아”     

우선, 회사의 이름이 산뜻했다. 통상 광고회사는 이름을 지을 때 일부러 독특하고 색다르게 짓는다. 이름에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얻어야 하고, 환상적으로 보이게끔 지어야 광고주로부터 호기심을 자극해 선택받을 확률이 높다. 또한, 광고회사를 시작하면 돈과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 설립하면서부터 곧바로 광고를 수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아는 타고난 재력이나 든든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실장이니 백 프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여행 중에 이렇게 옆자리에 앉은 분한테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에요.”     

“이 하 동 문입니다.”     

“언제까지 서울에 계실 거예요?”     

“예 저는 나흘 정도 예정하고 있습니다.”     

영진이 생각 없이 그냥 한 말이었다. 차창 밖을 보았다. 여름은 여름이다. 진한 연둣빛 산들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어머 그러세요.” 여인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서울 스퀘어』 건물 내 『카페 베르데』에 왔다.      

혼자 호텔로 들어가기가 심심해서도 아니었고 둘이 은근하고 끈적한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다만, 어쩐지 이대로 끝은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 역광장을 빠져나오자 영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뜻밖에 연아는 망설임 없이 신선하게 대답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당당했다.     

“그럴까요. 그럼 제가 서울에 출장 오신 기념으로 커피 한잔 사 드릴게요.”     

8월의 태양 아래 세상은 온통 뜨겁게 달구어진 가마솥 안이다. 카페로 오는 잠깐 사이에 온몸에 땀이 스며들었다. 이럴 때 내리쏟는 소나기는 생동감을 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의 일기예보에는 소나기 소식은 없었다.      

더위에 발그레진 그녀의 볼이 빨간 사과처럼 익었다.

열기를 뿜어대는 바깥 기온과는 달리 실내는 에어컨 바람으로 이내 춥게 느껴졌다. 

영진은 에어컨 바람이 그녀에게 직선으로 닿지 않도록 바람 방향을 위로 올렸다.

막상 둘이 마주 보니 연아는 분위기만으로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괜히 말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많이 했는데....”          

영진이 웃으며 가볍게 농담을 했다.          

“고마워요! 친절에.....”          

연아가 화답하며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에어컨 바람 방향을 돌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말일 것이다. 그녀의 환한 미소가 영진의 가슴을 또다시 출렁이게 했다. 마치 그가 사는 대산시 푸른 바다의 파도처럼 기분 좋은 느낌으로 전해왔다.

희고 선한 얼굴에서 “가슴을 스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그녀는 참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둘의 대화는 일상적인 가벼운 소재로 시작되었고 점차 여러 주제로 범위가 넓어졌다. 그녀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결코 오만하지도 가볍지도 않았으며 말을 이어가는 솜씨나 언어의 구사도 예사롭지 않은 품위가 있었다. 주로 그녀가 주도했고 영진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며 듣는 쪽이었다.          

대화를 할수록 그녀에게 새로운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문득 이런 여자라면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 괜히 “오버한다.” 싶어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영진이다.

결혼은 삶이란 이름의 또 다른 출발선이다. 영진은 이미 첫발부터 잘못 내디딘 초라한 패배자가 되어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잠깐씩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엷은 그늘이다. 이제는 전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혼한 아내 경윤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런 느낌이 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다시는 사랑의 아픔을 겪지 않으리라.”          

지난해 경윤과 이혼하고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을 다짐했었다. 그러면서도 대화를 하며 조금씩 알아가는 지금은 자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연아도 영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둘은 이심전심으로 이 우연한 만남에 대한 운명적인 강한 끌림을 벌써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KTX 옆자리에서, 그리고 카페에서 마주한 4시간 동안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호감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서로의 개인 생활에 관하여는 일절 묻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만나는 남자가 있을 수도 있고, 결혼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인연이라면 반드시 맺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주고받은 명함에는 이름도, 전화번호도 있다. 비록 상세 주소까지는 알지 못해도 어느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싱글, 더블, 돌싱 이런 말 따위도 더욱 필요치 않다.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며 경건한 이 자리에서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더 탐구해야 할 미지의 세계에서 다룰 일이다.     

시계는 벌써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시간을 확인했기에 영진도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가세요. 대산에 내려오시면 꼭 연락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덕분에 오늘 즐거웠습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나눴다. 그러나,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다만, 반드시 만날 것이라는 기분 좋은 느낌은 들었다. 아마 연아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영진은 한 번의 결혼 실패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주어야 하고 돌려줄 수 있을 만큼의 사랑만 받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연아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주 부드러우면서 은근한 유혹을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가도록......     

호텔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다. 번잡한 상가 골목에는 몇몇 상인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저녁 장사 준비에 한창이다. 

저마다 힘겨운 포부를 안고 녹록하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숙연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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