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좀 괜찮은 거야? 그동안 너무 고생했지?.”
“영진 씨도 고생 많았어. 나 챙겨주느라....ㅎ”
“무대에서 너무 멋졌어. 진짜로... 역시 연아는 대단해.”
영진과 연아는 지금 해동 용궁사로 향하는 길이다. 우리나라 절 중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절로 알려진 용궁사는 바다와 맞닿아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기도하면 누구나 한 가지 소원을 꼭 이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사찰로도 유명해져 오늘도 수많은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다.
연아는 오늘 저녁 서울로 떠난다. 대산을 떠나기 전에 영진과 같이 관광명소를 가보고 싶다는 연아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광고 기획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친 연아는 어제 늦게까지 관계자들과 뒤풀이를 하고 오전까지 호텔에서 쉬다가 11시쯤 짐을 챙겨 나왔다. 다른 일행들은 오전에 항공편으로 모두 올라가고 연아는 영진을 만나 한나절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영진은 용궁사를 찾을 때마다 입구에서 바라본 절 풍경이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에서 바라본 용련암과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해 보리암과 양양 낙산사와 함께 관음성지의 한 곳이다. 오늘은 10월의 끝물인데도 날씨도 좋고 운치도 있다.
“저분도 여자 친구가 마냥 사랑스러운가 봐.”
머리 희끗한 중년의 연인이 앞에서 걷고 있었다. 여자의 어깨를 살포시 안고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다감스럽다.
영진이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연아를 쳐다본다.
“그렇지... 참, 다정스러워 보여.”
영진의 눈에도 나이를 잊고 웃고 얘기하며 즐거워하는 커플의 모습이 마냥 보기 좋았다. 가을날에는 거리의 가로수마다 단풍이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모양과 색깔도 있지만 향기 또한 나무마다 달라서 사람들의 심사를 설레게 한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무료로 차를 제공하고 있어 둘도 웃으며 차를 받아 마시면서 잠시 풍경을 감상했다.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일 것이다.
“영진 씨! 득남불이라고 하네....”
백팔계단 초입에 서 있는 할아버지 부처 불은 코와 배를 만지면 득남한다는 소문에서인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배와 코부분이 매끈하고 반지르하다.
“아이고~~~ 부처님! 제가 우리 영진 씨 아이 좀 갖게 해 주세요.”
연아가 코와 배를 연달아 만지면 짐짓 경건한 모습으로 합장하고 기도까지 마쳤다.
영진이 웃으며 연아를 보았다. 오늘은 특히 대견스럽고 이쁘게 보인다. 아마도 매력이 넘치는 연아의 능력을 지난 일주일간 옆에서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108 계단에 들어섰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번뇌가 소멸되고 지극정성으로 왔다 가면 백팔 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하여 장수 계단이라고 하는데 추야(秋夜) 명월(明月)로 보름달 밝은 밤에는 그 운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환상적이다. 연아의 요청으로 둘은 계단을 세 번 오르내렸다.
금강경에는 “여래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므로 오고 감이 없는 여래라고 말한다.”라고 했다. 또한 “일체 모든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으니 이렇게 관찰할 지어라.”며 기록했다. ‘金剛般若波羅蜜經(금강반야바라밀경)’은 부처님이 제자 수보리에게 한 설법이 주요 내용으로 『꿈과 허깨비(夢幻), 그리고 금방 사라지는 거품과 그림자(泡影)란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인생이 헛되고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는 것이다.
영진은 1시간 정도 연아와 절을 둘러보면서 금강경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사람이란 끊임없이 탐욕을 취하다가 허망하게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야구나 농구 등 스포츠 선수 중에서 상당히 공격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선수들을 우리는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괜히 연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세상에 태어난 걸 처음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게 해 준.... 영진 씨에게 감사해....
사랑해....”
“이런 마음은 탐욕이 아닌 거 맞지?”
둘은 용궁사 근처 한정식 집을 찾았다. 도보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라 산책 겸 쉬엄쉬엄 걸어가며 여유를 가졌다. 맛집으로 알려진 식당은 시골집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곳으로 육․해․공 모두를 맛볼 수 있었으며 연아는 푸짐하고 다양한 반찬들을 맛보며 즐거워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노곤함이 밀려오는 연아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지난 일주일간의 부지런했었던 일이 이제야 피곤함으로 변해서 찾아온 것이다. 영진은 차를 이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주차하고 연아를 위해 좌석을 뒤로 젖혔다. 바깥 풍경은 가을의 맑은 햇살에 덮여 아늑하게 느껴지고 오가는 사람들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연아는 오랜만에 가슴이 편안해져 있는 것을 느꼈다. 매일이 그렇고 매시간을 긴장하며 지냈던 날들이었다. 그동안 깊게 잠이 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대산에서 영진의 곁에 누웠을 때만큼은 꿈도 꾸지 않고 늘어져 깊이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다. 연아가 눈을 떴을 때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시간은 아쉽게도 저녁 6시다. 이제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내가 너무 잤지?”
“아냐. 한 번씩은 깊게 자야 해. 그게 몸에 좋아.”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영진 씨는 혼자 뭐 했어?”
“나도 좀 잤어. 근데 여러 가지 잡 꿈을 꾼 것 같아.”
사람은 날마다 꿈을 꾼다. 단지 기억하지 못하는 꿈이 많을 따름이다. 흔히 개꿈이라 하듯이 능력도 없는 사람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헛된 기대의 꿈은 허황하다. 그러나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인 이런 꿈은 모두 가져야 한다. 오늘 영진은 잠시 졸면서 꿈을 꾸었다. 계절에 어울리지도 않는 과일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나무에서 하나를 따서 연아에게 주었더니 달고 부드럽다며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개꿈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둘은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연아는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눈물을 쏟아냈고 영진은 괜히 혼자 떠나가는 연아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코끝이 찡해져 왔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우연한 인연을 만들어 서로를 위로하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이 많다는 것을 다시 알게 해 준 이번 만남이었다.
대산의 한 호텔이다. 현수와 그의 친구는 많이 취한 것 같다. 그러나 오늘 경윤은 몸이 너무 무거웠다. 며칠 전부터 속이 불편해 제대로 식사도 못했다. 좀 나아졌다 싶다가도 다시 안 좋아지기를 반복하며 더러는 몸살 기운까지 겹쳐서 오기도 했다.
속초에 사는 은원의 친구 현수가 이곳 대산까지 경윤을 보러 오겠다며 전화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지난번 속초에서 헤어질 때 “대산에서 한번 만나자.”는 말을 인사치레 정도로 여겼던 경윤으로서는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은원은 지금 부모님을 모시고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멕시코에 갔다. 떠나기 전 멕시코 중부의 어느 지역이라고만 말했었다.
“다음 기회에 오시면 안 되나요? 은원 씨도 없고. 저도 일이 바빠서.....”
은원도 없는데 굳이 오겠다는 현수를 혼자 만나기 부담스러운 경윤이 다음을 기약하며 만류했지만 결국 그의 결심을 꺾지 못하고 오늘 대산의 한 호텔 바에서 이렇게 만난 것이다. 현수가 대산으로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내려와 경윤의 미술관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괜한 오해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황급히 호텔의 위치를 알려주며 라운지에서 만나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그를 만나면 막상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간단히 안부만 묻고 헤어질 작정이었는데 마음에 없는 술자리에 앉아 있자니 마치 벌을 서고 있는 심정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그는 회색 정장을 입고 저쪽 끝에서 경윤에게 손짓을 했다. 그의 옆에는 현수의 친구라는 낯선 남자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어쨌든 만나기는 했지만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지난번 속초에 갔을 때의 융숭한 대접과 은원의 친구인 그를 외면하기에는 영 마음이 불편한 것도 있다. 오늘 경윤은 렌즈 대신에 붉은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현수는 건강관리를 잘한 탓인지 외모부터 강건한 청년 같아 보였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현수가 경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윤이 마지못해 현수에게 오른손을 내밀자 이번에는 씽긋 웃으며 경윤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생각지도 않게 일격을 당한 모양새가 되었다.
셋이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텅텅 비어 있었던 곳이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자리를 잡자 현수는 위스키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앞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경윤에게만 자꾸 말을 건넸다.
“잘 지냈어요? 내 생각 좀 했어요? 난 경윤 씨 생각 엄청 많이 했어요.”
마치 의도한 질문인 듯 빠르게 물었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경윤의 어깨를 감싸기도 하고 허리에 손을 갖다 대기도 했다. 경윤은 그런 현수의 손을 의식해 자꾸 밀어내었다. 경윤은 오늘 현수의 일방적인 행동이 영 개운치 않아 그의 건배 제의에도 몸이 아프다며 술잔에 입만 몇 번 대고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 현수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술 마시는 속도도 빨라서 둘은 벌써 위스키 한 병을 비우고 또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러면서도 현수는 동석한 남자에 대해서는 일절 소개가 없었다.
“에이~~~ 한잔 하세요. 속초에서 얼굴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게요.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다음에 오면 좋았을 텐데...
은원 씨도 하필 여행 가고...”
“내가 매력 없어? 내가 남자로 보이지도 않아요?”
“무슨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이미 취한 듯한 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정색한 얼굴로 물었지만, 경윤은 시선을 외면한 채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 그래도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남자란 말이야!”
“네. 인기 많다고 저번에 은원 씨한테 들었어요.”
경윤이 분위기가 어색할까 봐 마지못해 립서비스를 하자 한껏 고무된 현수가 경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여기서 그만 마시고 대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클럽에 한번 가보자.”
숫제 이제는 반말로 뻔한 수작을 부리는 듯했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무렵이다. 경윤은 흥을 낼 기분도 몸도 아니어서 남은 술만 마시고 일어설 작정으로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오늘 마신 술만 벌써 위스키가 세 병이 비워졌고 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익어 있었다.
“클럽 가기에는 제가 몸이 안 좋아요. 오늘은 두 분만 가세요.”
“뭐? 그건 아니지. 좋아. 그럼 이 친구 집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 이렇게 헤어지기는 내가 섭섭해서 그래.”
눈을 치켜뜬 현수가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면서 말했을 때 경윤은 다리에서 갑자기 힘이 쑤욱 빠졌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도 삶는다.”라고 경윤도 이런저런 남자들을 겪어봐서 안다. 남자의 여자 욕심이란 끝이 없다. 무조건 여자를 정복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남자를 한두 명 보았던가? 인심과 우정, 사랑을 잃어도 순간의 제 욕구를 채우다 패가망신한 짐승 같은 인간을 여럿 보았다.
적당한 성욕은 인간에게 활력과 연인과의 사이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지만 쓸데없는 탐욕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그렇더라도 절친 은원의 애인인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경윤은 마자믹 순간까지도 그의 양심을 믿었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현수의 친구가 앞에 타고 경윤과 현수가 뒷좌석에 앉았다. 택시 안에는 이내 두 남자의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그냥 술도 아니다. 위스키인데도 약간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바닷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택시는 이리저리 복잡한 길을 잘도 헤쳐 나갔다. 20여분 정도 달리던 택시는 10층 규모의 아파트 앞에서 멈췄다. 택시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경윤을 현수는 한사코 팔을 뻗어 잡고는 내리기를 재촉했다. 현수의 강요와 택시 기사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해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여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현수가 힐끗 경윤을 보고 흰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몸을 딱 붙이고 끌고 가는 수준으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는 단 몇 초 만에 10층까지 올랐다. 경윤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가닥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현수 씨! 여기가 누구 집이에요?”
“여기 집주인은 우리 이모야. 지금은 이 친구가 살고 있어. 술 좀 있어?”
거실로 들어온 현수가 동수를 보며 물었다. 택시 안에서 처음으로 친구의 이름이 이동수라는 것과 여행사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물론, 경윤 씨 맞이할 준비를 며칠 전부터 했었지. 이부자리까지 새로 준비했는 걸”
현수의 친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경윤은 불쾌한 기분 탓인지 온몸에 열이 올랐지만, 더 이상의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이미 술과 몇 가지 간단한 안주가 놓였다.
“자. 술 한잔”
하고 이번에는 동수가 웃음 띤 얼굴로 술을 권했다. 경윤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뱉는다. 소주 한 병이 순식간에 비워지고 다시 한 병을 꺼내려고 동수가 일어섰을 때 경윤도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더 이상 지체할 마음이 없었다.
“이제 그만 가야겠어요. 여기까지 온 것은 은원 씨 친구에 대한 예의차원이었어요.”
그러자 현수가 경윤을 어깨를 붙잡아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의 상의를 벗어 소파 위로 내던졌다. 경윤은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동수를 보았다. 경윤과 눈이 마주친 동수는 다시 현수를 보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현관문의 자물쇠를 채우고 체인까지 걸어 잠갔다.
시간은 거의 밤 12시를 향하고 있다. 택시에 내렸을 때 한두 방울 내리던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경윤은 은원과 통화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핸드폰을 들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연결은 되지 않았다. 현수를 만나러 오는 동안에도 전화를 했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자 현수가 굳어진 얼굴을 경윤을 보며 말했다.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어떻게 오랜만에 만난 낭군님한테 뽀뽀 한 번을 안 해주나?”
경윤은 두 눈을 부릅뜨고 현수를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이제는 차라리 애원을 했다. 현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잡아당기며 키스를 하려 하자 경윤이 좌우로 힘껏 머리를 흔들었다.
“현수 씨! 이러지 마세요. 은원 씨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 난 잡놈이다. 잡놈이 무슨 뜻인 줄 잘 알 거야. 그렇지?”
경윤은 몸이 덜덜 떨리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현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너도 잡식성 아니야? 남자라면 가리지 않고 다 하는 잡식성.....”
그러면서 경윤의 이마 위에 흩어진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 올리려고 했지만, 경윤은 또다시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이리 와.....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오늘은 곱게 해 줄게....”
아예 이제는 노골적으로 하반신을 딱 붙이고 비벼대었다. 경윤은 현수의 몸을 힘주어 밀어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수가 기분 나쁜 어조로 말했다.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당연히 함께 밤을 보내는 거 아니야?”
현수가 물고 있던 담배를 거실 바닥에 던졌다. 다 타지 않은 담배 냄새가 온 집안에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동수가 그것을 보고 실내화를 신고 있던 발로 담배를 뭉개버리고 일어나 안방 문을 열었다. 순간 경윤이 몸을 급히 돌리자,
“가긴 어딜 가!”
현수는 거칠게 경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놔요!”
“들어올 땐 네 마음대로 들어왔을지 몰라도 나갈 때는 안돼!”
그녀가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당신들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놔요. 난 나갈 거예요.”
그 순간, 현수는 힘껏 경윤의 양쪽 뺨을 후려갈겼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가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에 그만 풀썩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붉은 뿔테 안경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어찌나 놀랐는지 경윤의 돌돌 말린 몸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수와 동수는 끌다시피 경윤을 안고 안방 침대 위에 밀어 넣고는 동수가 경윤의 몸을 잡고 현수는 두 손으로 그녀의 블라우스의 앞섶을 잡아채고, 후드득 단추를 뜯어내었다.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속살을 보며 둘은 마주 보며 낄낄대었다.
경윤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 손으로 앞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것과 오로지 현수에게 애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발 이러지 마요. 현수 씨.”
현수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히고 자신의 바지를 벗고는 그녀의 몸에 올라탔다.
“아아~~~!”
경윤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하며 두 눈엔 그렁한 눈물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내장이 온통 쏟아지고 휘말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외침이었지만, 현수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마음대로 소리 질러보시지. 혹시 은원이 그 새끼가 널 구하러 올 것 같아?
걔 지금 약혼녀 하고 멕시코에 둘이 즐기러 갔어. 넌 그것도 몰랐지?”
“이럴 수 없어. 이럴 수 없어.....”
경윤이 발버둥을 칠수록 현수는 더욱 거칠어졌고, 현수의 무릎이 엄청난 힘으로 허벅지를 눌러 왔다.
그대로 난폭한 짐승이 되어 버린 두 사내의 행위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경윤의 몸은 차갑고 싸늘하게 식어갔다. 경윤은 속으로 내뱉었다.
『오늘 일을 잊지 말아라. 내가 지금 무너진 것은 몸뚱어리만이 아니다. 내 영혼까지 무너진 것이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이 물러가고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경윤은 그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몸 구석구석까지 뇌리에 깊게 새기려는 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현관문을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는 집안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일어났다. 윗옷이 다 찢어졌다. 하체는 허리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를 내리고, 앞가슴을 수습하면 족했다. 걸음을 옮기기 힘들 만큼 통증이 뒤따랐지만 기어가다시피 하며 간신히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에는 창백한 얼굴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설마 자신은 아닐 것이라며 수없이 되뇌었다. 젖가슴을 비롯해 온몸에는 여기저기 깊은 상흔이 남았다.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두 짐승의 흔적을 씻어내고 닦아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두 놈은 새벽까지 공허하고 무모한 그 짓을 번갈아가며 몇 번을 해대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경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지만 휴대폰을 찾아 세라의 번호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