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의 남편 기윤은 과묵한 편이다. 평소 화도 잘 내진 않지만 좋다는 표현도 잘하지 못하는 무난한 사람으로 자신을 이뻐하긴 해도 섹스를 밝히는 사람은 애초부터 아니었고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만 아내의 침실을 찾았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였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이 그런 쪽으로 영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여태껏 살아왔다. 부부지간이라지만 그냥 편한 친구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편이 맞을 듯했다. 그러다가 영진을 만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사랑의 감정과 섹스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난 것이다.
처음엔 그저 남사친으로 지낼 생각이었다. 환경단체 사무실에서 영진을 처음 만난 날 인사를 받으며 상냥하게 웃어주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 영진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먼저 대시했고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영진은 어쩌면 정미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열렬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를 만나고서부터 외모에도 관심을 가지고 몸매도 더 관리했다.
오늘도 정미는 영진을 만나 불타는 섹스를 나누고 11시쯤 집에 들어왔다. 자신의 행동이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잘못이고 죄를 짓는 행동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일탈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처음에는 전적으로 섹스가 목적도 아니었다. 그냥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가정적으로 아쉬운 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진을 만나 왠지 모를 이끌림에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외도란 걸 처음으로 하게 되었지만 오로지 상대가 영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동안 정미는 영진을 잊으려 노력도 했다. 그러나 끝내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사랑의 방식에 익숙했고 섹스도 잘했다. 단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흥분되었고 섹스를 하는 동안 그는 몸 구석구석을 정성을 다해 만져주었다. 그럴 때마다 정미는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 되었다. 영진의 속삭임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 줄은 아마 그를 겪은 여자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정미는 그와의 섹스를 통해 비로소 온전한 여자가 된 것이다.
“당신, 요즈음 너무 바쁘네....”
“응. 그렇지?..... 미안해. 당신한테나 애들한테 내가 못 챙겨줘서...”
“바빠서 그런 걸 어떡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몸도 챙겨가면서 해.”
평소 같으면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보다가 자고 있을 남편이 오늘은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반기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런 남편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정미다.
“오늘 모처럼 당신하고 보내야겠네. 조금 있다가 침실로 갈게.. ”
정미로서는 요즈음은 남편과의 미지근한 섹스를 하는 것보다는 영진과 키스를 하고 그를 안고 있는 것이 더 행복하고 익숙했었다.
그나저나 영진과 걸쭉한 섹스를 치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남편과의 섹스가 부담스러워진다. 정미는 모텔에서 나오기 전에 씻었지만 다시 한번 꼼꼼히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었고 혹시나 섹스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심신이 힘들어도 피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서니 남편이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다가 이불을 들어주면서 몸을 비켜준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살면서 남자로서의 매력보다는 항시 진중한 행동으로 더 믿음이 갔었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하고 반듯한 남편의 태도와 행동이 가장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정미도 옷을 벗고 남편 옆에 알몸으로 누웠다. 남편의 섹스 패턴은 항상 똑같다. 가볍게 키스를 하고 젖가슴을 쥐고 몇번 대충 만지다가 아래로 얼굴을 내려 꽃잎을 빨아댈 것이다. 조금 전까지 영진과 침대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공방전을 치른 뒤라 자신을 쓰다듬던 손길이나 입으로 애무해 주던 그 여운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아마도 지금부터 정미는 남편에게 아카데미상 주연급 연기를 펼쳐야 할 것이다.
오늘만큼은 남편이 그곳에 입을 대고 혀로 핥아주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의 정해진 패턴은 다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젖가슴에 입을 대고 기본적인 애무를 하는가 싶더니 점점 아래쪽으로 머리를 내린다. 두 번이나 씻기는 했어도 자신의 몸 안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영진의 정액이 분명히 남았을 것이다.
남편의 혀 놀림에 온통 촉각을 세우고 있으니 흥분이 될 리가 없다. 처음에 부드럽게 혀를 놀리던 남편이 강도를 세게 높이고 있다. 얼얼한 클리토스에 아픔이 전해진다.
정미는 남편의 머리를 두 손으로 힘주어 잡고는 세게 부딪치지 않게 조절하고 있다.
“아~~~~ 여~~ 보~~~ 살~살~해. 응~~~”
일부러 비음을 토해가며 부탁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결국 정미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실제 통증이 점점 심해지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의 애무로 인해 정미가 달아올랐다고 생각하는지 땀을 뻘뻘 쏟아내면서도 정성을 다한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인위적으로 멈추도록 해야 한다.
“아 ~~~ 여 ~보 ~~ 그 ~만 ~~ ”
남편의 두 귀를 잡아서 끌어 올라오게끔 했다. 통증이 점점 커져만 간다. 남편은 정미의 두 다리를 잡아 올리고 계곡 사이로 자신의 거시기를 밀어 넣고 부지런히 허리를 움직였다. 정미는 다리를 들어 올려 남편의 엉덩이를 감싸고 양손으로 그의 등을 깍지를 끼어 안고는 밀려오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 ~~ 자기야~~~ 빨 ~리 ~~ 아 ~~”
남편은 정미의 요청에 힘줄까지 세우며 힘차게 부딪쳐오다가 더는 못 견딜 한계점에 이르러자 정액을 몸 안에 뿌려대었다. 유난히 길고 힘들게 느껴지는 오늘 밤이다. 남편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자기 피곤했나 봐..”
“왜요~~~”
“당신 거기서 나오던 물이 항상 달콤하고 좋았었는데 오늘은 맛이 전혀 다르더라구...”
심한 통증까지 참아내며 견디었는데 섹스가 끝나고 남편이 던진 한마디가 양심의 가책이 되어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살아오면서 정말이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정미의 남편 하기윤은 아내의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어렴풋이나마 외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업주부로만 지내다가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그러려니 생각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서울 출장을 다녀온 후부터 들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보다는 자신의 옷차림과 외모에만 투자하고 신경을 더 쓰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회식을 핑계로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아졌으며 어떤 날은 전화조차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윤은 정미의 뒤를 캐기는 싫었다. 누구나 한때의 바람이 일 수도 있고 한 번쯤은 외도를 꿈꾸지 않는가? 물론, 이렇게 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내 정미와 다정하게 한 침대에 누워 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욕을 느끼고 싶은 본능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 여자는 감정적이고 감동에 약하다. 밤마다 자신의 손길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기윤이 정미를 기다릴 차례다. 연애하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아내는 사람의 기본적 도리를 크게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아내를 향한 자신의 기다림이 지금은 기약 없다는 것뿐이다.
“아빠. 배고파.”
“배고파? 얼른 아빠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뭐 먹고 싶어?”
“뭐 해줄 수 있어요?”
“아빠는 요리사.... 뭐든 다 만들어 줄 수 있지.”
“우와~~ 우리 아빠 최고!”
“떡볶이 먹고 싶어요. 떡볶이 해주세요.”
“O~~ K”
기윤이 퇴근해 현관문을 열자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졸라대었다. 여전히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다. 아내가 반찬을 해 두었다지만 아이들의 입맛에 맞춘 반찬은 아니다. 오늘도 아내는 저녁에 단체 회식이 있다며 연락이 왔었다. 직장생활을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회식 문화다. 기윤은 회식이 자주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앞치마를 두르고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맞벌이하는 정미를 위해서는 최대한 배려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날 자정을 넘겨 귀가한 정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얼른 씻고 자....”
마음은 아이들에게 더 신경 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날 지친 모습의 정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한 말을 시키면 오히려 정미가 더 피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미는 영진과 매일 통화를 하고 저녁에는 같이 지내는 날이 많았다. 둘이 알몸으로 누워있는 날들이 점점 잦아진 것이다. 무엇보다 정미는 자신이 영진에 의해 한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품에 안겨 있는 지금의 시간이 그대로 멈추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미는 “이러면 안 된다.”며 마음을 먹어도 자꾸만 영진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영진이 자신을 위해 팔베개를 해주며 같이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평온하고 행복했다.
방갈로의 따뜻한 방에 앉아 그의 품에 안겨 바라본 낙동강의 야경과 입술을 찾아 입안으로 들어오는 달콤한 혀에 정미는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블라우스 단추가 영진의 손에 풀려나가고 그의 손길이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가락까지 몸에 닿을 때마다 황홀감에 젖어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몸을 열어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기윤은 정미의 최근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리고 낯설었다. 오늘도 정미는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며 아주 진한 화장과 화려한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일하러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데이트하러 가는 모습이다. 어찌 된 세상이 이 도시에서는 집을 나서기만 하면 온통 유혹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다.
기윤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간식거리를 샀다. 그리고 아이들의 숙제를 점검하고 준비물을 미리 챙겨주고는 혼자 밖을 나왔다. 전에는 정미가 했었던 일이 지금은 모두 자신이 해야만 했다. 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오늘처럼 귀가 시간이 늦은 날의 정미는 전화를 걸어도 잘 받지 않았다. 벌써 이런 생활이 수개월째 반복되고 있다.
기윤이 아파트 놀이터에서 담배를 물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주차장으로 차가 한 대 들어왔다. 아파트 상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인해 멈춰 선 차 안에서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가벼운 포옹과 함께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내리는 여자는 다름 아닌 아내 정미였다. 기윤은 그 자리에서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용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할 단계까지 온 것이다. 힘겹게 집으로 들어와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정미는 밀려갔다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혼자 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앞으로 정미가 자신과 아이들에게 어떻게 대할지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닮은 사람과 같은 방향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 참 행복한 일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기윤은 정미를 처음 소개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무뚝뚝한 자신에 비해 정미는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붙이고 애교 있게 굴었으며 똑 부러지게 말을 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효성스러운 며느리였고 아이들에게 다정했던 엄마였다. 그런 아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몽땅 내주고 있다. 기윤은 막상 아내가 이혼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며칠 동안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요즈음 가을 햇살은 비 한번 내리지 않고 얄밉게도 따뜻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오랜만에 당신하고 데이트하려고....”
“어디로???”
“글쎄.... 가는 동안 비밀이야. 근데 가보면 당신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치이~~~”
기윤은 정미를 데리고 차를 몰아 대산 시내를 빠져나왔다. 오늘 아침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윤이 먼저 정미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같이 점심 먹을래?”
“왜?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아니. 오랜만에 당신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어.”
새벽에 정미가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남편 기윤은 베란다에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정미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점심을 같이 하자는 남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기윤이 정미를 데리고 간 곳은 낙동강의 배후 습지로 알려진 우포늪 생태공원 근처에 있는 현대식 건물의 식당이었다. 미리 기윤이 예약을 해두었기에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둘은 2층으로 안내되었다. 식당 분위기가 앤티크 한 느낌이라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우리 직원들한테 물어봤지. 몇 군데 추천을 해주었는데 여기가 당신이 더 좋아할 것 같았어.”
“응. 아주 마음에 들고 음식 맛도 좋은데.”
둘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 무슨 일이야?”
“응. 뭐가?”
“그냥 무슨 말인지 말해 봐.”
“말은 무슨.... 특별히 없는데...”
“그럼 다행이고.... 나 당신 남편이야 알지?”
“누가 내 남편 아니라고 해?”
정미는 이렇게 대답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아내 정미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준 적 없어. 그것도 알지?”
“알아요. 나도 당신하고 같아.”
“그래. 이제 우리만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노력하자.
정미야. 난 앞으로도 당신과 우리 아이들만 보고 살 거야.”
“미안해. 앞으로는 나도 노력할게.”
사무실에 들어온 정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틀림없이 남편은 뭔가를 아는 눈치였고 자신에게 “이제 그만 가정으로 돌아오라.”라고 부탁 겸 경고하는 것이다. 남편이 만약 영진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모를 일이다. 정미는 지금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불안정하다. 아니, 조금만 더 욕심을 내어 그래서 영진의 사랑을 얻게 된다면...... 난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둘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정미는 정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영진과의 만남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뻔한 답인 것이다. 다만, 이별로 인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슬픔에 잠겨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
며칠 후 정미는 술을 먹고선 영진의 집으로 찾아갔다. 환경단체 사무국장 일을 그만두던 날이었다. 회장을 비롯한 단체 사무실 직원들과의 작별모임의 성격이었다. 모두 그동안 정들었던 정미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말을 많이 했지만, 정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아 술잔만 비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막상 영진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결국은 사랑한 그 사람도 이제는 지나간 사람이 될 것이다. 그날 정미는 울고 또 울었다. 일행들은 정미의 눈물이 자신들과 헤어지는 게 슬퍼서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 살아야 해. 영진 씨! 혹시 다음 생에서 영진 씨를 만날 수 있다면 난 그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당신을 먼저 만날 거야. 사랑해 영진 씨!”
돌아보지 못할 것 같다. 돌아보면 돌아갈 것만 같아
후회할 것만 같아 돌아보지 않는다.
떠나는 순간부터 어떤 이유를 붙여도
나 자신을 합리화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아
차마 미안하다 말하지 못한 것은
한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 것은
너를 위한 내 마지막 양심이야
마음속 할 말 천마디도 넘을 것 같은데
정작 한 마디도 못하고 떠난다.
아무리 그리워도 옛 추억은 돌아오지 않겠지
함부로 부르기조차 소중했던 그때는
나를 위해 미소 지어주지 않겠지
먼 훗날
그래 먼 훗날 후회할 거야.
그때 돌아볼 거야.
[출처-원태연 이 마음 맞아요?]
정미가 환경단체 사무실을 그만두고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기윤과 정미의 가정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무엇보다 크게 변화된 것은 각방을 쓰며 따로 생활했던 부부가 이제는 하나의 방에서 같이 생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가을 나들이도 했다. 어디를 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연애야 죽고 못살아한다고 하지만 결혼이 꼭 사랑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그 어디에도 영진의 그림자는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한 번씩 정미의 가슴속에서 불현듯 아프게 아프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