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은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세라가 영진에게 연락한 것은 경윤이 무자비한 행위에 울며 몸부림쳤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짐승에게 당한 사랑하는 여인의 아픔처럼 자신의 심장에도 지금은 붉은 선혈이 점점이 검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세라의 얘기를 듣고 있던 영진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벌떡벌떡 일어나 앉기를 반복했다.
그날 아침, 전화를 받은 세라는 그 집에서 벗어나 상가 슈퍼 앞 모퉁이에 앉아 있는 경윤을 발견했다. 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착각 속에서도 경윤은 세라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언니....”
경윤은 세라를 보자마자 이 한마디만 간신히 떼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석고상처럼 단단히 굳어졌다. 경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세라는 단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몸은 괜찮아?”
천근만근 무게의 돌덩이가 세라의 가슴을 짓눌렀다. 경윤은 곧장 영진에게 전화를 하려다 차마 자신의 몰골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일개 여인의 자존심만이 아니었다.
가을을 좋아하는 영진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을날의 작은 울렁거림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계절이 바뀌고 달라지듯이 그의 훈훈한 얼굴에도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면 지금도 계절의 열병을 꼼짝없이 앓게 되는 자신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였기에 지금 이렇게 추한 자신의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일이다.
겨우 부축해 차에 오른 경윤은 세라의 품에 안겨 울고만 있었다. 세라도 같이 울면서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녀의 가슴도 지금 갈기갈기 찢어져 마음속에 쌓이고 있었다.
“언니에게 전화하지 그랬어.... 하기사 그 상황에 온전한 제정신이 있었겠니.....”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한 세라는 경윤에게 따뜻한 차를 권했다. 산들바람에 고추잠자리 서너 마리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며 차 주위를 맴돌고 있다. 묵묵히 앞만 보고 앉아 있던 경윤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용히 말을 듣고만 있던 세라의 두 눈에는 독기 오른 파란 불빛이 잔뜩 새어 나왔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까지의 일을 다 듣고 난 세라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제는 한 시라도 빨리 경윤을 이 슬픔에서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내가 절대 그 두 놈을 가만히 둘 수 없어. 경윤아! 힘들어도 언니 믿고 맡겨.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몸만 추슬러....”
세라를 따라 병원과 경찰서를 갔다가 집에 돌아온 경윤의 몸은 체온이 용광로처럼 급격히 달아올랐고 하루 사이로 기력이 쇠진한 듯 자꾸 비틀거리기도 했다. 세라는 경윤을 위해 죽을 끓였고 약을 먹이고 몸에 난 상처에 연고를 정성스레 발라 주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경윤의 곁에 있으리라....
세라는 경윤을 가만히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뒤척이던 경윤이 지금은 곧게 자고 있다. 그런 그녀가 오히려 고마웠다. 내일 하루도 휴가를 내어야겠다.
오늘은 경윤의 전화를 받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집에 일이 생겼다고 나왔으니 내일은 다른 핑곗거리를 미리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 으... 음”
자고 있던 경윤이 자신도 모르게 아픈 신음을 내었다. 오늘 낮동안 경윤은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손을 한시도 놓지 않았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듯했다. 세라는 잠든 경윤을 보며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얼마나 밝고 명랑한 성격의 아이인가?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한 동생이 아니었던가? 내가 언니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조만간 영진을 만나 사실대로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쩐 일인지 경윤은 영진에게만큼은 이 일을 말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감정은 왜 생기는 걸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이쁘게만 보이고 싶은 욕심일까? 언젠가 영진을 바라볼 때 구름을 밟고 하늘을 나는듯한 황홀한 미소를 짓던 경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경윤은 지금 망망대해에 떠 있는 일엽편주다. 거친 풍랑과 뒤집힐 듯이 거대한 파도가 곧 올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영진이라면 경윤을 위해 노 젓는 행위를 결코 멈추지 않을 사람이다. 예전부터 그런 믿음을 세라는 갖고 있었다.
세라가 영진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다 말했을 때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긴 신음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한, 진하디진한 눈물이 두 사람의 볼을 타고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뭍으로 올라서리라. 그때는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평화로운 ‘그래도’라는 섬에서 만나리라......』
영진이 온통 파란색 장미꽃을 안고 경윤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세라와 만난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기적,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랑’이란 꽃말을 담고 있는 그 꽃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며 동분서주했다.
영진이 처음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네 개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던 영진이 꽃을 건네주며 다가가 가만히 안아주었다. 처음에 영진을 보고 잠시 당황하던 경윤도 비로소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영진의 얼굴을 보고 세라가 얘기했음을 알아챘다. 경윤은 영진에게 안겨서 울고 불며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충분했다. 걸레 마냥 찢긴 가릴 수 없는 자신의 몸을 한없이 사랑해 준 사람은 오직 영진뿐이 아니었던가?
“약은 챙겨 먹었어?”
영진이 시선을 살짝 피하는 경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돌려세우면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경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밥 챙겨줄게..... 참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그때까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던 경윤은 갑자기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는 듯해 그제야 슬며시 영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밥은 따로 챙길 것도 없었다. 세라가 만들어 놓은 죽과 반찬을 데우기만 하면 되었다.
“참. 경윤아!”
영진이 다시 한번 경윤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부드럽게 부를 때 가장 행복했었다. 영진은 둘이 뜨거운 사랑을 나눌 때 꼭 이름을 부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영진은 이 한마디를 통해 의기소침해 있는 경윤에게 자신의 사랑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 2주간 휴가 냈어. 같이 있어도 되지?”
경윤의 눈에서 이제는 눈물이 고였다.
“이리 와 봐.....”
새하얗던 손가락이 파리할 정도로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힘껏 안고 싶은 마음이지만 지금 그녀의 몸은 너무 약해져 자칫 잘못 안게 되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를 보는 눈빛은 더없이 따사로웠다.
“사랑해.....
아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
이 순간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도 영진의 가슴에 남을 수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차갑게 식어 있던 심장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경윤은 영진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참았던 울음을 진하게 토해내었다. 영진의 얼굴에서 뜨겁고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 보....
그래. 경윤아. 오늘 하루만 실컷 울어!”
지금까지 영진은 자신에게 핏줄을 준 아버지보다,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욱 소중한 사람이었다. 비록 이혼은 했었지만, 그가 있었기에 누구에게나 당당했고 어디서든 마음이 푸근했었다. 가끔은 외롭고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은 영진이 곁에 없어 그를 그리워할 때였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그동안 영진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주었던가? 마치 불치병처럼 생각하며 밤을 함께 보낼 남자를 찾아다니기도 했고, 더러는 일부러 영진에게 상처 주려 작정하고 하룻밤 몸을 섞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 결국은 현수라는 사람과 속초에서 인연이라 부를 수 없는 더러운 관계가 맺어진 이유였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비굴해지더라도, 아니 영진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영진의 여자가 되어 그만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다.
영진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경윤의 얼굴을 보았다. 마음에도 상처가 많겠지만 여린 그녀의 몸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밤새 두 놈에게 시달리고 유린을 당한 몸은 이미 정상을 벗어나 있었다. 잠옷을 벗기고 수건에 뜨거운 물을 적셔 조심조심 상처 부위를 닦아내고 연고를 발랐다. 그래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자신이 경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부담이나 트라우마를 갖지 않도록 한없이 감싸주고 보호해줘야 하는 것뿐이다.
아침이 되어 뭔가 딸깍거리는 소리에 눈을 떤 경윤은 영진이 곁에 없자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부엌 쪽에서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는 영진을 확인하고선 이내 안심했다.
“내가 전복죽 끓였어. 새벽시장에 가서 튼실한 놈으로 사 온 거야.”
“언제 갔다 왔어? 영진 씨도 피곤할 건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대령할게요....”
“자기가 전복죽도 끓일 줄 알아?”
“그럼. 내가 웬만한 여자들보다 요리도 살림도 더 잘해.”
그리고 이내 음식을 차리고 경윤을 일으켜 세웠다. 경윤은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란 사실을 깨닫고 상처 난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이불을 당겨 젖가슴을 가리자 영진이 가운을 가져와 입혔다. 경윤은 어제보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영진 씨가 차려준 식탁에 앉으니깐 정말 좋아.”
“앞으로 많이 있을 거야. 마음 쓰지 말고....”
“고마워. 그래도 내가 차려줘야 하는데...”
경윤은 수저를 들고 전복죽을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간이 심심했다.
“왜? 맛이 없어?”
“아냐. 괜찮아. 자기도 먹어....”
둘은 좋은 상황은 못되어도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이 아닌 죽을 먹었다. 영진이 새벽같이 일어나 정성을 기울여 만든 전복죽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려오며 입안이 깔깔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경윤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품었다. 영진이 양팔로 등을 안았다. 마치 새끼 새가 놀라지 않게 품 안으로 품고 있는 어미 새의 행동이었다.
잠시 후, 영진이 경윤을 안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빰을 감싸고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영진은 당장에 몸이 달아올랐지만 아직은 몸이 성치 않은 그녀를 위해 무조건 참아야 했다. 영진이 가만히 들어 안고서 침대 위에 눕히자 경윤의 두 눈은 무겁게 감겨들었고 마음과 달리 눈이 잘 떠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경윤은 얼굴이 수척해진 것을 빼고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몸의 상처도 많이 아물었고 예전의 모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경윤의 모습을 보며 영진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동안 세라는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길에 들러 경윤의 얼굴을 보고 차도 같이 마시고 때로는 셋이 식사도 했다. 영진은 그동안 경찰서를 찾아 사건의 처리 과정과 향후 일정을 확인했으며 경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진료도 받았다. 그리고 가끔 드라이브를 나서기도 하고 둘이서 집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진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트에 들러 신선한 재료를 구입해 요리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경윤은 행복해하면서도 고생하는 영진의 모습을 안쓰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영진은 경윤을 위로했다.
“마음 편하게 가지고 어서 하루속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