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은 항상 설레고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지난밤에는 모처럼 깊이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랜만에 몸이 상쾌했다. 연아는 오늘, 병원에 가기로 했다. 입맛이 없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잦은 헛구역질로 밥을 먹지 못해 회사 라운지에서 과일이나 샌드위치로 간단히 때우는 날이 태반이다.
회사 직원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곧 그룹으로 재탄생될 유신건설의 미래에 대해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 언론에서 이미 그룹으로의 승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은 유신건설의 국내외 경제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종윤 부사장이 이미 진출한 해외 사업의 안정화와 수익 창출을 통해 글로벌 경영을 가속화하고, 중국, 베트남, 인도, 러시아, 유럽을 잇는 네트워크 완성을 통해 글로벌리더십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최 부사장은 주력 계열사인 유신건설의 차기 사장으로 승진할 것이 거의 확실한 상태라고 알려져 있다.
“실장님! 몸이 안 좋아 보여요. 병원에 한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주 앉아 있던 최 팀장이 연아에게 말했다. 어제 오전에 최 팀장과 같이 늦은 아침인지 이른 점심인지 알 수 없는 식사를 하기 위해 회사 라운지의 테이블에 앉았을 때 겨우 빵 한 조각 베어 물고는 그냥 내려놓는 연아의 몸 상태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아니야. 그냥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연아가 사무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려 할 때 갑자기 빈혈이 일어나 순간적으로 몸이 흔들리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놀란 최 팀장이 힘들어하는 연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부축하며 휴게실에 눕히고 의사 친구의 병원을 급히 예약했었다.
지금, 연아는 진료를 받고 나와서 내과 대기실에 앉아 초조하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휴대폰으로 오늘 챙겨야 할 일을 직원들에게 지시하며 체크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연아의 이름이 불리고 곧 의사와 마주 앉았다.
“박연아 씨!”
“네.”
“병원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네? 제가 무슨 큰 병이라도.....?”
순간, 연아가 긴장하며 물었을 때 의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내과 진료가 아니라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야 하겠어요.”
“네??? 선생님. 그럼 제가 혹시 임....시....이....”
“네. 그런 것 같아요.”
연아는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한테 감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튼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병원을 나서며 연아는 하나님과 부처님, 신령님을 포함한 자신이 현재 기억하고 있는 모든 신들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던가? 이제 자신의 몸속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소중한 생명의 잉태는 여자의 권리이자 연아 자신이 처음으로 완벽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곧바로 영진에게 감격스러운 소식을 전하려다 겨우 참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서울에서 같이 지내기로 약속했으니 그때 짜~~~~잔 하고 서프라이즈로 멋진 선물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일이라도 당장에 아늑한 방을 꾸미고 은은한 빛을 내는 요염한 조명으로 꾸며야겠다. 그렇지!!!! 좋은 와인도 미리 구매해 둬야겠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동안 연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대산에서 영진과 같이 득남불을 만지며 열심히 기도했었던 덕분인 것 같다. 연아는 싱글벙글하며 자리에 앉았다.
꽃을 피우는 식물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1억 3천 만년전이며 이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40만 종으로 늘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꽃은 식물의 번식 수단이다. 꽃가루를 최대한 널리, 그리고 깊게 퍼뜨리기 위해 새나 곤충의 부리 모양에 맞춰 진화해 왔다. 그리고 꽃은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를 유지해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한다.
연아는 사람도 꽃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대를 이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삶의 연속성이라고 하는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여자의 임신이다.
그동안 연아는 배가 남산만 한 여자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무척 부러워했다.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의 애를 낳아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는데 이제야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영진 씨! 나, 엄마가 된대요.”
“우리 같이 좋은 엄마, 아빠가 되자.”
“실장님! 축하드립니다.!”
최 팀장이 의사 친구한테 연아의 임신 사실을 전해 듣고 인사를 건넸으며 이어서 다른 직원들도 모두 달려와 축하를 말을 전했다. 연아의 얼굴에는 낭패라는 표정과 함께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혼전임신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민망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몸 안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불타올랐던 흔적이 남았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금 영진의 뜨거운 몸이 느껴진다. 지금이 여자로서는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최 팀장은 광고 기획전 준비 당시에 대산의 호텔 룸에서 늦은 밤 연아와 영진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후끈거려서 얼른 몸을 돌려야만 했다. 그때 연아가 반색을 하고 일어나 최 팀장을 불러 세우고는 영진을 소개했다.
“팀장님! 웬 남자가 같이 있어서 놀라셨지요?”
건장한 체격에 선한 얼굴의 영진이 웃음을 띠며 당시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연아의 객실에 들어오기 전에 “지금 뵙고 보고 드리겠다.”며 연아의 양해를 얻었던 최 팀장은 영진과 같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오늘 같이 저녁 먹고 갈래?”
“네. 좋아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실장님!”
최 팀장이 덩달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아는 최 팀장의 이런 밝은 행동과 표정을 특히 좋아한다.
“내일은 부사장님께 임신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어. 직접 내 입으로 얘기하기는 쑥스럽긴 하지만..... ”
연아가 애피타이저(appetizer) 타임에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 메인요리를 먹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니 그동안의 헛구역질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들어 온 연아는 적당히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한 후에 코코넛 향이 은은한 기름을 한 방울 손에다 떨어뜨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머리카락은 오일을 흡수하느라 조금씩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손에 묻어있던 매끄러운 향기들은 온통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지금의 모든 하나하나의 작은 절차들이 행복하기만 하다. 이제는 건조한 피부에 사랑의 묘약을 바를 차례다. 얼굴부터 내려가며 목, 젖가슴, 배, 엉덩이, 거울에 비친 고운 육체의 선을 따라 눈을 감고 천천히 더듬어 내리며 마사지를 해본다. 그리고 임신한 자신의 배를 몇 번이고 어루만져 보았다. 한마디로 신비스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 영진과 통화하면서 임신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그러다 이렇게 맨몸으로 누워있으니 영진의 뜨거운 몸이 숨이 막히도록 그립다. 자신의 흥분을 모두 태워줄 수 있는 이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다. 점점 더해지는 강렬한 욕구와 젖은 온몸을 지탱하기가 너무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실장님!”
부사장실로 들어선 연아를 반기며 최종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연아가 부사장을 찾아온 것이다.
“광고 기획사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직원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연아가 조금은 비장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룹으로 승격을 앞두고 부사장이 지금 얼마나 바쁘다는 것을 연아도 잘 알고 있다. 연아는 그룹 관련 자료를 공유받고 준비하고 있는 몇안되는 최 부사장의 라인이고 측근으로 불린다. 물론, 어디까지나 연아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업무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뿐이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부사장과는 친구 맺기로 했던 사적 관계가 있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왔네요.”
부사장이 차를 직접 연아에게 따라주며 말했다.
“그렇죠.”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은 연아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회사가 어수선한데도 이상하게 연아 씨만 보면 안정이 되는 것 같아.”
“저도 그렇습니다.”
둘은 밝고 편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예. 부사장님. 사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가 뭐 하지만..... 그래도 제가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씀만 아니면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연아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사실, 저 임신했어요. 어제 병원에 갔었는데 12주가 다 되도록 몰랐지 뭐예요.”
부사장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연아의 손을 힘껏 잡았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축하해요.”
“죄송합니다. 회사가 한창 바쁜 시기에....”
“무슨 그런 말씀을.... 이젠 정말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써야겠어요.”
연아는 부사장이 궁금해하는 영진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얘기를 해줬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지금은 어떤 처지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그와 만나 사랑을 느끼고 겪은 그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다고도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점점 더 그에게 빠져들어 있으며 그의 삶에서 꽃을 피우고 싶다고도 했다.
부사장은 주위 테이블은 모두 비어있고 지금 사무실 안에는 둘 뿐이지만 목소리를 낮추고 상반신까지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말해봐요. 내가 뭘 도와주면 좋겠는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연하지. 친구사이인데....
알았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아볼게요.”
연아는 새삼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뜻이 맞는 사람이면 제일 좋고, 두 번째로 좋은 것은 상대방과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능력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열흘 뒤 연아는 회사로부터 재택근무 명(命)을 받았다. 그리고 가사 도우미와 임원들에게나 제공되는 승용차와 기사까지 포함해 제공되었다.
“글로벌기업을 지향하는 우리 회사에서는 앞으로 회사의 이윤 창출과 명예를 현저하게 드높인 임원과 직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공적 심사 위원회를 열어 그에 걸맞는 복지혜택을 제공할 것입니다.” 는 신규 방침을 내부 전산망을 통해 공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