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은 벌써 오후 세 시를 향하고 있었다. 사과 농장에 위치한 ‘윤이의 꽃’ 카페는 사과나무는 물론, 꽃들과 나무로 가득 찬 매력적인 농장에서 커피와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직접 만든 음료와 빵 모두 높은 수준의 맛을 제공해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단점은 있지만 퀄리티에 대한 부분에서는 대부분 만족감을 얻는다. 또한, 넓은 주차장을 갖추고 있어 차량 이용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영진은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맛과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거의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열심히 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삶에 이끌려 살다 보면 사랑했던 여인 경윤과 연아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고 그때는 아픔도 잊고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카페 일을 하다가도 아주 가끔은 짬을 내서 농장 집에 들어와 경윤이 없는 소파에 외로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 숨소리를 모으며 또 다른 경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듯 눈을 감는다. 경윤을 둘만의 공간인 이곳으로 이끌어 들기 위해서 ...경윤이 들어서면 향기로운 사과꽃 향기를 마구 뿜어내곤 했다.
윤회를 믿는 불교에서는 “세상 모든 만물은 인(因)과 연(緣)이 합하여져 생겨나고 그리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말을 한다.
즉, 인과 연이 만날 때가 인연이 시작되는 때이고, 인과 연이 흩어질 때가 바로 인연이 끝나는 때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연을 맺으려 노력을 해도 맺을 수 없게 되고 아무리 피하려 해도 인연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것을 ”시절 인연“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경윤과 나의 인연도 “딱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이승과 저승으로 둘의 인연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이 현생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고 헤어짐 또한 현생에서 이루어졌으니 금생에 업을 짓고 내생에 받는다면 또 다른 인연이 도래(到來)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까지라도 인연을 만들고 싶은 영진의 요즈음 마음이다.
“삘리리..삘리리...”
영진이 잠시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할 때쯤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카페 직원의 전화였다.
“여보세요..어어~~ 나다.... ”
“사장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사장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누구시라고?....”
“그런 말씀은 없으시고 중년의 신사분이십니다.”
“그래????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주시라고 해줘.”
영진이 빠른 걸음으로 카페에 들어섰을 때 창가 쪽에 자리 잡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영진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최종윤입니다.”
호감형이다. 영진은 막상 그의 이름을 듣고 보니 익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직접 대면해서 알았다기보다는 가끔 언론과 뉴스를 통해 이름을 들었고 무엇보다도 연아가 그의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그리고 유신건설의 실세라는 얘기도 오래전 연아가 말해주었다. 얼핏 듣기로 지난번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도 들었던 것도 같지만, 비서도 없이 혼자 찾아온 자체가 무척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김영진입니다.”
영진도 명함을 건넸고 직원에게 같은 커피를 달라고 했다. 그나저나 소위 잘 나간다는 그룹의 사장이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아마도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분명히 연아의 일 때문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카페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직접 찾아주셔서.....”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저는 연아 씨와는 직장 동료이면서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영진 씨 자랑을 엄청 하더라고요. 막상 이렇게 뵈니 단번에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얼마 전에 어려운 일을 겪었다는 말씀도 연아 씨로부터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요즈음 연아 씨랑 통화를 자주 하십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하고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한없이 강하다. 일을 핑계로 인연의 깊은 정을 끊으려고 애를 써봐도 마음같이 잘되지 않아 간혹 안부만 묻고 끊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도 독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아닙니다. 카페 개업 후에는 바빠서.....안부만 간단히 물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연아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처럼 그렇게 되묻는 영진의 심장이 갑자기 철커덩하고 내려앉았다. 경윤을 떠나보낸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있었을까 봐 걱정스러운 것이다.
지난해 연말,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을 아픈 경윤의 병간호를 하느라 지킬 수 없었다. 그 며칠 전 설레며 기다리고 있을 연아에게 전화를 했었다.
사람의 예감은 가끔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휴대폰에서 영진의 이름이 보이는 순간, 연아는 불길한 느낌이 스친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 나 못 갈 것 같아. 경윤이 많이 아파.”
한 마디씩 또박또박 말하는 영진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네?”
놀란 연아의 음성이 수화기 저 너머로 들려왔다. 언제나 다정하고 섬세함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영진이다. 연아는 마음이 떨려 목소리조차 떨렸다.
“어떡해. 영진 씨! 알았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건강 챙기면서 간호 잘해드려.”
그 뒤로 경윤이 세상을 떠나고 영진은 그에 대해서는 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통화는 했었다. 아이를 낳고 마냥 행복하고 설레는 날을 보내야 할 연아는 경윤을 잃고 슬픔에 잠겨 빠져나오기 어려운 영진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근 통화한 것이 일주일 전이다.
“우리 영진 씨가 많이 힘들었구나?”
다시금 연아의 마음이 아파온다. 자신에게 내색은 하지 않아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아프고 짠해지면서 안쓰럽다.
자신의 행복만을 먼저 생각해서 영진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경윤에게도 영진에게도 모두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투정도 부리지 않고 서운하다고 표현해 본 적도 없다. 물론,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영진에 대한 자신의 굳은 사랑의 믿음만큼은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잠시 헤어져 살지만, 언제든 상황이 괜찮아진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만 우리는 “잠시 안녕”이다.
“제가 여기 오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커피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최종윤이 말을 잇는다. 더불어 영진의 얼굴이 표시가 나도록 굳어졌다. 분명히 들리는 말을 문맥대로 해석한다면 연아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영진이 다시 물었을 때 잠깐 뜸을 들인 최종윤이 말했다.
“연아 씨가 영진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영진이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겨우 물었다. 잠시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라는 게 멈춘 듯했다. 다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기쁨이 교차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영진 씨의 아이를 연아 씨가 홀로 낳아서 지금 키우고 있습니다. 아주 예쁜 공주입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영진의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양극성으로 진화했다. 악한 놈은 더 악하게 선한 천사는 더욱더 관대하고 도덕적으로 진화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이기적인 침팬지인가? 아니면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인가?
그동안 왜 연아의 행동과 말에 관심을 두지 못했던가? 살기 위해 몸부림친 연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했던가? 더 이상의 질문도 대답도 없이 영진은 고개를 숙이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런 영진을 향해 최종윤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연아 씨 혼자 결정했지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대산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주제넘게 이렇게 영진 씨를 직접 찾아왔습니다.”
“아닙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다음 일은 영진 씨와 연아 씨가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이니깐요.”
“네~~~네. 말씀을 안 해주셨다면 어쩌면 저는 평생 모르고 살아갈 뻔했습니다.”
“사실은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그동안의 일은 연아 씨에게 직접 듣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한 시간 남짓 카페에서 머무른 최종윤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따라 일어선 영진이 소리 죽여 숨을 내뱉는다.
한번 스쳐 가는 바람이라고 하기엔 연아와의 인연도 가슴이 저미도록 아팠다. 생각해 보니 전화조차 자기 말만 하고 끊었다. 무엇보다도 가끔은 연아가 카톡으로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답을 잊고 지낸 날이 많아졌다.
다음 날 아침, 영진은 재잘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7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이 충만했었던 연아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아예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영진은 자신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연아를 생각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전 카페 일을 마치고선 아버님께는 서울에 급한 볼일이 있다며 시간이 다소 걸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만 드리고 부지런히 역으로 달려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서울에 도착한 영진은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연아는 케이크와 꽃을 들고 서 있는 영진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자신의 눈과 마주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해.....”
영진이 그렇게 말하고 연아를 끌어안았다.
“뭐가 미안해? 영진 씨가 왜 미안해?”
연아는 잠시 몸을 떼다가 다시 영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얼마나 안기고 싶었던 가슴인가? 얼마나 맡고 싶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였던가? 하루 수십 번도 더 보고 싶었던 내 하나의 사람, 그런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바보구나. 우리 영진 씨”
“미안해..... ”
영진으로서는 그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지치고 많이 힘들었을 연아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연아도 경윤을 떠나보낸 뒤 영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힘든 내색 한번 못하고 지내 온 영진을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났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끌어안고 있었다.
『끌림의 과학』은 사랑을 중독으로 정의한다. 비유적으로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중독된다. 연아는 KTX에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이미 이 남자에게 중독되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연아는 영진과 장밋빛 인생을 꿈꾸었다. 평생을 같이 살고 싶었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경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경윤과 단둘이 만났던 적이 있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며 어렵게 연락처를 알아낸 경윤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서로가 한 남자에게 빠져버린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만난 그날, 친동기간처럼, 친자매처럼 편안하게 생각했었다.
“그건 우리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니겠어요?”
연아가 경윤에게 “영진을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좋아하면 그만이지 왜 남의 눈치를 보냐며 자신은 사랑하는 영진을 공유할 수도 있다고 당당하게 말을 했었다.
“서로가 좋아하는 만큼 그에 따른 어려움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지.”
헤어질 때 연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 사실만큼은 말해줄 수 없었다. 같은 여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항상 궁금했던 경윤을 뜻하지 않게 만나 반가웠고 고마웠으며 또 한편으로는 경윤이 얼마나 영진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반면에 경윤도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영진을 혼자 두고 떠나기에는 너무도 가슴 아팠기에 연아를 만나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막상 만나고 보니 힘들 때 다독거려 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조언해 주는 그런 든든한 사람이 그의 옆에 있으니 떠나는 자신의 마음이 한결 가벼울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윤이 싸늘하게 차가워진 겨울바람과 함께 이승에서 인연의 끈을 놓은 것이다.
그때 연아도 눈물을 머금고 영진을 한낱 지나가는 바람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접기로 했었다.
기억은 사라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살아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다 행복하고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조금은 슬프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영진과 연아는 서로를 위해 사랑을 주저했지만 결국은 서로를 꽉 잡게 되었다.
아픔을 딛고 뒤이어 또 다른 생명이 봉긋봉긋 솟아나듯이 순환적 질서를 통해 둘의 사랑은 더욱 성숙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연아가 사과꽃이 되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영진과 경윤과 연아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은 숙명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