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아온 오리 Nov 04. 2024

잠수 18화

“이혼할 거야?”  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영지를 만나고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전철 문 안에 비추며 빠르게 지나가는 유리창을 쳐다봤다. 

덜컹거리며 휙휙 지나가며 터널의 검은색으로 가득했다가 전철 역의 전등 불빛으로 환해짐을 계속 반복했다. 전철 문 바로 앞에 서서 그 반복을 쳐다보고 서 있는 희진의 표정 없는 얼굴이 전철 문 유리에 그대로 비춘다. 표정 없는 희진의 얼굴조차도 덜컹거리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외모부터 달라진 영지와 마주 앉은 희진은 예전의 희진은 아니었다.    

  

“이혼했어. 살아야 하니까 일을 해볼까 싶어서.”     


말없이 각자의 찻잔을 들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침묵을 깬 건 희진의 그 두 마디였다. 영지는 희진의 말을 듣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희진을 쳐다봤다.     


“네가 네 얘기를 할 때가 있네?”     


희진도 순간 자신이 낯설었다. 희진은 원래 자신의 얘기는 누구에게도 잘 안 하는 편이었다. 유일한 고등 동창인 단짝 친구 빼고는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나 속내는 입 밖으로 내는 적이 없었다. 지인들하고도, 동네 학부모들하고도 그저 일상적인 얘기와 농담으로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다. 그런 희진이 오랜만에 만난 영지에게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돌리지도 않고 털어 놨다.     


“그러게.”     


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이 들어서 그래.”     


고등 동창이자 단짝 친구인 미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미는 농담처럼 그 말을 하면서 애써 웃는가 싶더니 그게 아니면 외로워서일 거라고 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전업 주부들의 대부분이 외로움 때문인 걸 생각하면 희진도 그럴 수도 있단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여자는 결혼을 하면 작은 섬에 갇힌 거 같은 단절을 느끼나 보더라. 연애 때 잘해 주던 남편들도 결혼하면 와이프랑 대화도 잘 안 하고, 와이프 감정이나 기분에 대해 관심도 없어 보이니까. 임신하고 출산하고, 아이한테 매달렸다가도 어느 순간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공허함과 그 무엇도 채워주지 못하는 외로움을 느끼는 거지. 인간은 나라는 존재에서부터 뭐든 게 출발하는 건데, 대한민국 여자들은 결혼하고 임신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가 뒤로 빠져 있거든.”     


미는 심리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희진과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라고 같은 초, 중, 고를 졸업한 오랜 단짝이었다. 희진이 유일하게 자신의 얘기나 속내를 덤덤하게 털어놓는 친구이기도 했다. 희진 보다 일 년 전에 이혼한 돌싱이다.

미는 결혼하면서 임신으로 인해 대학원을 휴학 했다. 출산하고 이 년 동안 육아에 전념하면서 현타가 왔었단다. 자신과 육아가 안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단다. 

미는 교수인 남편과 크게 싸우고 이 년 만에 대학원에 복학했다. 그리고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따는데 전념 했다. 그러는 동안 미의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돼 버렸다. 미의 남편은 미의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통지서를 받는 즉시 미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미는 이상하게도 담담하게 재산 분할을 협의하고 사인을 해 주었단다. 이상하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홀가분하고 덤덤하게 사인을 해 주게 되더란다.

희진은 미와 상황이 다르긴 했다. 덤덤할 수가 없었다. 한기에게 이미 실망이 밀려오고 있었고 지쳐 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불륜을 저지를 거란 건 왜 예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희진은 한기와 그 여자의 통화를 듣고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자신이 바보로 느껴졌었다. 미 앞에서 처음으로 오열은 한 것도 변호사를 선임한 날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오열하며 울어야 했는지 희진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미가 이상하게도 덤덤하게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해 주면서 그 이유를 몰랐던 것과 같은 건지, 다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혼남인 줄 알았다 하라고?”     


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한술 뜨던 수저를 그대로 들고 한기를 쳐다봤다. 한기는 뚝배기에 깍두기 국물을 따르고 있었다. 김이 오르는 뜨거운 국밥을 수저로 천천히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허기졌는지, 그러고 보니 한기는 항상 허기져 있었던 거 같다. 선화와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선화의 몸 안으로 자신의 것을 밀어 넣으며 선화의 몸을 달아오르게 할 때도 항상 허기져 있는 사람 같았다. 선화는 이상하게도 한기의 그 허기져 보이는 모습에 한기의 모든 걸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한기의 항상 허기져 보이는 그 모습에서 자신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선화의 허기짐이 한기의 허기짐과 같은 종류인지는 선화도 알 수 없다. 그저 선화와 한기의 허기짐이 서로를 끌어안고 놔 주지 못하는 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통할까?”     


선화는 한기의 와이프가 갖고 있는 블랙박스 통화 증거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선화는 한기와의 벌거벗은 통화를 즐겼다. 한기와 통화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한기와 부비부비 비벼대던 살결과, 한기가 자신과 있을 때 자신의 귀에 가까이 대고 들려주던 숨소리, 한기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던 그 배고픔, 자신의 입안으로 한기의 것을 집어넣고 입으로 춤을 추던 그 채워짐을 깔깔거리며 떠들었다. 한기도 그런 선화의 거리낌 없고 발가벗은 대화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를 끊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화 자신에게 오고 싶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와이프와 아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한기의 아쉬운 아슬아슬함이 즐길만했다. 그러고 나서 애틋하게 손을 맞잡고 호텔 대관 실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그 달아오름이 좋았다.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몇 년을 홀로 돈을 벌고 부동산 재산을 증식시키면서 악착같이 살아온 선화에게 온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네가 이혼남인 줄 알았다는데 어쩔 거야? 그리고 이혼남이 아니란 걸 알고 헤어지려 했는데 내가 이혼한다고 붙잡았다 그래.”     


“이혼할 거야?”     


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끄덕이니 또 한 번 끄덕였다. 

여전히 선화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뚝배기에 바닥나 가는 국밥을 수저로 떠서 마지막 국물까지 다 떠먹을 듯했다. 한 손으로 뚝배기를 뚝배기 받침에 살짝 기울여서 받쳐 놓고 있었다.

선화는 수저를 입안으로 떠 넣으려다 국밥 안에 든 고기들을 수저로 퍼서 한기의 뚝배기 안에 넣어 줬다. 한기는 그런 선화를 힐끔 쳐다 더니 아무 말 없이 선화가 떠 넣어 준 고기와 남은 국물을 떠먹었다.

선화도 그제야 한 수저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토요일 연재
이전 17화 잠수 17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