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여전히 재수 없게, 예쁘게 시크해.”
희진은 건물을 돌아 봤다.
“십 년 만에? 야, 요즘 코로나 때문에 있는 애들도 자르는 판이야. 더구나 치고 올라오는 젊은 애들 감각을 네가 이길 수 있겠어? 10년 동안 집에서 아줌마로만 살아 놓고?”
희진은 씁쓸했다. 발끝이 까졌는지 쓰라렸다. 오랜만에 신어 보는 구두였다.
일자리나 떠볼까 해 결혼 전에 잘 알고 지낸 선배를 찾아가 보겠다고 했다. 친정엄마는 희진의 신발장과 옷장을 열어 보더니 백화점으로 끌고 갔다. 구두를 신고 가라며 신상 구두를 사 주었다. 캐주얼 하게라도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가라며 정장 한 벌을 결제해 주셨다. 그래서 오랜만에 어색하지만 굽이 오 센티는 되는 구두에 몸을 전체적으로 조금은 조여 오는 캐주얼 정장을 차려입고 왔다.
십 년 동안 집에만 있으면서도 그냥 청바지에 티나 추리닝을 입고 다닌 건 아니다. 아주 간단하게라도 눈썹은 그리고 비비 크림과 마무리 팩트는 두드린 얼굴로 다녔다. 호진을 낳고 나서는 구두가 불편하고, 발이 불편하니 피곤했다. 그래서 어느 옷에나 무난하게 어울릴 듯한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옷차림도 캐주얼 하지만 되도록 롱스커트에 편안한 블라우스나 센스 있는 티셔츠로 조금은 신경 쓰며 다닌 편이다. 그래서 어느 옷에나 무난하게 어울릴 듯한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호진이에게 엄마가 완전 아줌마라고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집에만 있어도 나 스스로를 위해 너무 게을러지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배를 만나고 나온 순간, 오랜만에 신은 오 센티 굽의 구두와 너무 신경 써 입은 티가 나는 캐주얼 정장이 되려 자존심 상하게 느껴졌다.
“어머, 혹시 희진이?”
희진은 슬며시 자신의 어깨를 치는 여자를 돌아봤다. 자신의 아래위를 자세히 훑으며 ‘맞지? 맞지?’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영지였다. 날씬해지고 세련되진, 분명 영지였다.
“어, 안녕?”
희진과 일할 때 영지는 통통했었다. 뚱뚱 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통통했었다. 스트레스를 간식으로 푸는 편이었다. 영지의 책상에는 항상 과자 바구니와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는 군것질 봉지가 놓여 있었다. 하루에 네 번은 양치를 했다.
영지는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하고, 두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 밤을 새워 함께 일을 하는 데도 저녁이 되면 어느샌가 나가서 씻고 왔다. 밤새고 다음 날 다 같이 집에도 못 가고 일하는 데도 대낮에 어느샌가, 어디론가 가서 금세 씻고 왔다. 옷도 갈아입고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날씬하고 세련되지는 않았었다.
“웬일이야? 결혼하고 나서 얼굴 한 번 안 보여 주더니?”
희진은 애써 웃기만 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머리속에서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영지는 계속 희진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그러면서 희진의 한 손을 덥석 잡더니 잡아끌었다.
“건너편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는데, 핑크 핑크 하다더라고. 같이 가 보자.”
영지는 희진을 신호등 앞으로 이끌었다. 희진은 거절도 못하고, 잡힌 손을 어쩌지도 못하고 끌려가듯이 영지를 따라갔다.
영지가 데리고 들어간 카페는 말 그대로 정말 핑크 색으로 도배돼 있었다. 장식으로 놓여 있는 인형, 꽃이 꽂혀 있는 꽃병, 꽃병 속의 꽃들, 카페 안의 모든 테이블과 의자조차도 다 핑크 색이었다. 심지어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보이는 찻잔과 티스푼까지도 전부 핑크 색이었다.
영지는 구석 창가 테이블 앞 의자에 희진의 양 어깨를 살짝 눌러서 앉혔다. 그러더니 카운터로 가 음료를 빠르게 주문하고 한 손에 진동벨을 잡아 쥔 채 희진의 맞은 편에 털석 앉았다. 다리를 길게 뻗은 채 꼬고 앉아 희진을 쳐다봤다.
음료를 주문하면서 희진에게 무엇을 마시겠냐고 묻지도 않았다.
“혹시 다시 일하려고?”
희진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희진을 영지는 계속 빤히 쳐다봤다.
희진의 기억에 희진은 영지 보다 일이 빨랐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라디오 대본을 쓸 때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영지처럼 어느 순간 사라져 씻고 오고, 옷을 갈아입을 정도의 여유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래도 희진은 항상 동료들에게 하는 걸 못 봤는데, 안 보는대서 외모 관리를 하나 보다는 말을 들었었다. 희진은 항상 말라 있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등산과 러닝를 해서 탄탄하게 말라 있었다.
영지는 항상 그런 희진의 길고 마른 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만져 대곤 했다. 희진은 그런 영지의 손가락이 항상 불편했었다.
영지가 들고 있던 진동벨이 울렸다. 영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카운터로 가 두 잔의 커피를 챙겨왔다. 하얀 우유 거품이 얹어진 채 계피 가루가 뿌려진 카푸치노를 희진 앞에 놓아 주고는 김이 오르는 아메리카노 잔을 자신의 앞에 놨다.
“맞지? 너도 알지만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았잖아? 이 커피 취향 정도야 뭐.”
영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잔을 들고 김이 오르는 커피 향을 맡으며 희진의 눈치를 대놓고 살폈다. 희진은 계피 가루가 뿌려진 차 잔을 내려다봤다. 계피 가루 주위로 하얀 우유 거품이 뽀얗고 볼록하게 덮여 있었다. 그 하얀 우유 거품 아래에는 검은 커피 액체가 고여 있을 거다.
“그러네. 고맙네.”
희진은 무심한 듯 조용하게 말했다. 굳이 영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차잔을 들고 영지가 기억하고 있던 희진의 카푸치노를 우유 거품부터 입술로 천천히 무너뜨리며 들이 마셨다.
“넌 여전히 재수 없게, 예쁘게 시크해.”
영지는 피식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들이 마셨다. 잠시 동안 희진도, 영지도 서로 말이 없었다.